기독교 신앙, 참 불편하다
사람들은 왜 교회에 나올까? 왜 믿음을 가질까? 혹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을 내놓을까?
이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는데 그 종교에 입문하고 신자가 되기로 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일까?
나는 그 시작의 답은 의미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원시적 종교성 혹은 종교적 감정에서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른 다양한 신앙일지라도 그 원천은 사람이 갖는 원초적 종교성으로서 비슷한 유형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즉, 평안을 얻고 질병으로부터의 두려움에서 해방 받으며, 삶의 존재적 불안에서 평안을 얻으며, 인생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극복하려는 원초적 본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원시적 신앙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필요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원시적 종교심이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신앙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신앙의 발달 과정에서 성장 성숙이 이루어져 점차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흔히 원시종교니 고등종교니 하는 말도 그러한 차이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미신이나 종교라는 구분도 그런 분별의 일종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종교’ 라는 말이 최고의 가르침을 뜻한다는 점에서 세상에 최고의 배움의 길로 나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이해한다면, 시작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원시적 본능에 따라 시작했지만 배움의 과정을 통해 최고의 지식, 최고의 가치, 최고의 가르침을 얻게 되고 그만큼 성숙한 인간으로 진보하는 것이 종교가 갖는 목표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르심’이라는 단어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필요하여 하나님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따라 우리를 부르셨다는 이해가 기독교 신앙에 가장 중요한 고백 중 하나다. 신앙의 우선권이 우리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 쪽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이 시작한 그 일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따름’(following)이 된다.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이들이 처음에는 자신의 필요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필요를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기독교 신앙을 배우기 시작하면 무척 힘든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즉, 내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시작한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했다는 점, 내가 결정하고 요구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내게 요구하고 결정하며 따라오라(follow) 한다는 점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만날 때 신앙을 멀리하거나 떠나는 사람도 있고 애써 그 진실을 외면하고 자기 중심적인 가치와 필요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주도권을 내놓지 않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기독교 신앙이 아닌 자기 신앙을 고수하는 이도 있다.
누가복음 18:18-25을 읽어보자. 공무원이면서 부자 젊은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의 조건에 대하여 묻자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종교적 행위는 완벽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비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젊은 청년이며 돈 많은 관리에게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그 젊은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얼굴에 근심과 불편한 기색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의 요구는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성장하며 성숙을 거듭하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주도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꺼이 따라가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포기하게 될 때 영적이며 인격적인 성숙함을 선물로 받는 은총을 체험한다.
앞의 이야기와 대조된 한 사람이 있다. 앞의 이야기 다음,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다. 마치 앞의 이야기, 부자 청년에 관한 에피소드를 알고 있는 것처럼 삭개오는 예수님의 초대에 기쁨으로 응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았던 것이 있다면 네 배로 돌려주겠다고 고백을 한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누가복음 19:9-10).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자신의 길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다.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그 어려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결국 부자 청년 이야기처럼 예수님과 다른 길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려면 이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자기 욕망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때마다 고통스럽거나 아니면 성경을 덮어버리거나 할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나에게 걸려 넘어 지지 않는 사람이 복 있다”고 하셨다 (눅 7:23).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은 욕심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불편하고 거북하다. 이 불편한 진실이 꿀송이 보다 달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감격의 진리로 이해되려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기 보다는 성령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을 말하는 거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전 생애적인 도전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기를 요구한다. 날마다 반성하고 회개하면 살라 하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요구한다. 이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막1:15).
성경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주님의 뜻 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요구할 때 기꺼이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다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태복음 26:39).
나의 기쁨과 나의 만족을 위해, 또는 내 감정의 환희를 위해 힘쓰기 보다는 주님의 기쁨을 위해, 주님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라고 성경이 요구할 때 기쁨으로 아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4).
이 세상의 조건을 충족시켜 평안을 얻으려고 할 때, 이 세상의 평화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로 만족하라 할 때, 그 참 평화를 이해하고 세상의 불안한 조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요한복음 14:27).
내 자신을 높이고 내가 선호하는 일을 하며 내 고집을 관철시키는 일보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요구할 때, 지금까지 지켜온 내 삶의 가치와 생각과 감정까지도 내려놓기를 요구 받을 때 기꺼이 무릎을 꿇을 수 있다면;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가복음 9:23).
이 모든 요구들을 교리나 종교의식으로 대체하지 않고 깨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실천하기를 요구한다면, 그래도 기꺼이 아멘 할 수 있다면;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7:21).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6:15).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회개를 통해 은혜의 감격을, 주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목적을, 주님의 기쁨에서 자신의 참된 기쁨을, 그리스도의 평화에서 참 안식을, 복종을 통해 참 자유를, 종교와 교리를 넘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인격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불편하면 피하고 외면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잘못된 것을 고치기 보다는 모르는 척 하며 당장의 편한 길을 찾아가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죄에 익숙한 인간의 습성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러한 경향, 타락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성향을 죄의 뿌리로 보고 정면으로 도전한다. 만약 기독교 신앙에 진정으로 입문했다면 이 불편한 도전을 피할 길이 없다. 이는 죄성을 타파하고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흔히 회개했다는 표현으로 ‘깨어졌다’ 혹은 ‘항복했다’ 하는 말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고백이다. 의외로 기독교인들 중에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며 하나님과 힘겨루기 하는 이들이 많다.
기독교 신앙은 이 불편함을 기꺼이 맞아들일 때 얻는 자기 부정의 기쁨이다.
2013년 9월 25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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