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하나님?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젊은 친구가 우리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면서 “그 교회에 가면 하나님의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조금은 당황했었다.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까? 너의 그 느낌이 무엇이냐고 물어봐야 할까? 아니면 너의 느낌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차리니? 하고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러니? 라고 만 했을 뿐 사실, 할 말을 잃었다. 이 글을 읽으며 혹자는 왜 그 말에 당황하느냐고 물어올 수 있겠다.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느냐면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당황한 것은 이때문이다; 어떤 날 너의 느낌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고 느껴질 때, 그 때는 그 교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니? 하고 묻고 싶은 것이다. 너의 그 느낌에 따라 하나님이 계시기도 하고 안 계시기도 할까? 하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젊은 학생은 그가 찾아갔던 그 교회도 떠났다. 그의 느낌을 따라… 느낌이란 내 감정이 어떤 대상을 받아드리는 상태를 말한다. 그 감정은 각 사람이 갖는 인격적인 다양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러기에 각 사람마다 느낌의 감정은 인격만큼이나 다르고 차이가 난다. 인격을 형성하는 요소 중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 그 사람의 감정이다. 그 감정은 인격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것만큼 주관적이다. 똑 같은 사실에 대해서 각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감정은 주관적이라서 자기 중심적이다.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향해 갖는 자기 느낌은 대상으로부터 오는 객관적 사실이기보다는 자신이 가는 대상에 대한 판단이 강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면 “나는 저 사람이 좋다” 하는 느낌은 자기에게 좋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이 싫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조건에서도 사람의 주관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이는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것이 감정 느낌이 갖는 주관적 한계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저런 조건을 생각하며 판단하는 것을 이성적 판단이라 한다. 이럴 때는 주관적 느낌보다는 합리적 생각을 말하게 된다. 즉 “나는 그 사람이 이러 이러한 점에서 좋다고 생각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느낌은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어제는 그 사람이 좋았는데 오늘은 이런 저런 기분 때문에 그 사람이 싫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흔한 일이다. 부부 사이에도 일어나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감정은 사실 일관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감정의 느낌은 물과 같아서 어떤 그릇에 담기냐에 따라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바뀌는 변덕이 심하다. 이와 같은 감정의 느낌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한다면 얼마나 안정적일 수 있을까?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는 데는 감정의 느낌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느낌이 매우 주관적일 수 있다는 위험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체험한 증언들을 문자로 기록된 책이다. 문자 기록이란 이성적 활동이다. 문자는 감정까지도 이성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인 통로를 통해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서의 내용은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해했던 사람들의 고백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이해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들의 가르침이나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배우고 이해하며 기억하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 된다. 성서는 이러한 학습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교육백서와 같은 것이다.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역사를 배우고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배우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었다. 이 것은 그 때 그 때의 느낌을 따라 하나님을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주어진 경험과 가르침의 내용을 배우고 학습하며 훈련하는 것으로 신앙을 지켜간다.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하고 말씀하셨다(마 11:29) 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함으로써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세례와 성만찬을 행하는 의식과 함께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요소로 가르치셨다. 그래서 교회(敎會)라는 한문자의 뜻이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이라는 의미를 지녔기에 기독교의 교회를 잘 설명해주는 단어라 하겠다. 바울은 골로새서 1:9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베드로후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3:18)라고 권면한다. 인격에 감정이 중요하듯이 기독교 신앙에서 감정의 느낌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다. 신앙을 학습하는 이성을 불경한 것으로 매도하거나, 신비하거나 황홀한 무아지경의 느낌에 의존하다가는 자칫 미신으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의 규범인 성서의 가르침을 배워 그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감정의 느낌도 성서의 검증을 통해 이성적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2013년 10월 2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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