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에 목마른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2:38-39/표준새번역).
고대의 사람이든 현대의 사람이든 기적을 경험할 때 ‘신성함’을 느끼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과학이 발달된 현대에서도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기적을 보고싶은 기대감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 한 순간에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특히 절대자를 믿는 신앙인들의 마음 속에는 기적에 대한 소망이 더 간절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갖는 이유가 기적에 대한 기대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전능하신 절대자의 개입으로 자기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은 자연적 종교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기적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사실 성경을 읽게 되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적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과정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이야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다 알고 있는 대표적인 초자연적 기적이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복음서는 그 절반에 가까운 내용이 병을 고치는 기적 이야기다. 이천년 교회 역사에도 수 없는 기적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많은 기적들이 고백되고 찬양되고 있다. 사실 ‘기적적’인 일들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도 낮설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적을 바라는 일은 전혀 문제 없는 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과연 그런가?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는 일은 성서적이다. 그러나 모든 기적적인 일이 ‘하나님의 섭리’나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증거라고 믿으면 비성서적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자신들과 다르니, 그 가르침이 진리라면 그 증거로서 기적(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을 때 간결하고 단호하게 “없다”고 하셨다. 다만 ‘회개’의 표징만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성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적을 결코 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기적적인 일을 요구한다고 하여 아무 때나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을 받을 때 악마가 요구했던 것들은 기적이었다. 돌로 빵을 만드는 기적, 까마득한 높은 탑에서 뛰어내려 어느 하나 다치지 않는 기적 등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꾸짖으며 유혹을 물리쳤다. 이점에서 아무 기적을 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악령도 기적을 행하고, 더러운 영도 능력을 행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숨기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사건이 하나님의 전유물이라고 성경은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태복음 7:21-23).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a miraculous sign)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4). 이 얼마나 단호한가?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욕망이라고 단언하였다. 즉 타락한 세대의 증거다. 예수님의 관심은 기적이 아니라 죄의 ‘회개’에 있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 (마태복음 11:20-21). 회개에는 관심이 없고 기적에만 호기심을 갖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기적에 관심을 하지 말고 회개할 것에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기적이 없는가?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다. 악마의 기적은 예수님의 시험에서도 나왔듯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다. 예수님은 이 악마의 유혹을 신 6:16 을 인용하여 단호하게 물리쳤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마 4:6-7).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적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적은 분명하다. 당신의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행하시는 사랑의 행위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보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행하신 사랑의 행위였다. 능력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니다. 이 것은 악마의 유혹이다. 기적을 행하신 분의 입장에서 기적을 이해하여야 한다. 기적을 구경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신기한 능력이 될 것이지만 행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사랑의 행위다.
나는 이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 나는 이 기적에 대하여 말하라 하면 책을 한 권 이상 쓸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종종 가톨릭에서는 마리아 상에서 눈물이 흘렀다느니, 피눈물이 흘렀다는 소동들이 보고된다.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미신이라고 선언하지만 신도들은 여전히 그런 기적을 믿는다. 개신교회에서는 금가루가 뿌려졌다거나 또는 금이빨 생겼다는 등의 기적이 일어난다며 요즘 기적의 대세는 ‘금’ 만들기라는 소문도 있었다. 기적도 유행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그런 일들을 벌이고 계실까?
기적을 좇고 쫓는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나 자신의 죄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진리에 대한 열망도 없고 회개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는 열심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회개를 통해 경험하는 거듭남의 기적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다. 사랑의 기적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나타나는 것이다.
무당이 시퍼런 작두 위에서 춤을 춘다고 믿음과 사랑이 생겨날까? 금가루를 보고 금이빨을 보았다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드러나는 것일까? 불나방처럼 기적을 좇는 신앙의 마지막은 허망하게 될 것이다. 기적은 애쓰거나 바라거나 할 일이 아니다. 무슨 기적을 일으킨다며 성령운동을 한다고 할 말이 아니다. 성령은 금이빨 만들어주려 오지 않는다. 과시하는 기적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인다고 성령이 함께 춤을 춰주지도 않는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도울 뿐이다.
기적을 경험하고 싶으면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당신만 알도록 조용히 알려주실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을 돌아보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궁휼히 여기시며,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 하다면, 열심히 살다보면 종종 뜻하지 않은 기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2013년 9월 13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