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다 집사님 한 분에게 읽은 본문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잠시 망설이다 대답하기를 해석들이 다양하다보니 말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알고 있는 해석들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니 이런 저런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알려진 내용들이다. 이 본문의 뜻은 이런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하는 설교나, 이러한 혹은 저러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강연이나 글을 보고 얻은 내용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 집사님께 두 가지 질문을 했다. ‘누구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 말고, 지금 그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집사님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나요?’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해석하려고 읽나요?’ 였다. 이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껏 성경을 읽어도 자신의 주체적 감정과 생각으로 읽기 보다는, 설교가나 어떤 저자들의 글을 통해 얻은 안경을 끼고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가슴을 열고, 생각을 열어 읽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만나본 적이 없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성경을 무슨 암포를 풀듯 해석하여 이해하거나, 누군가가 해석해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알았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해 온 것이다. 결과는 자신의 그토록 신앙하는 대상을 만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거나 소문만 듣고마는 제 삼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성경, 특히 복음서와 바울서신들은, 그 중에서도 4권의 복음서들은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 삼자적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은 신앙에 치명적인 독이 되고만다. 사실 이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세속화 되고 위선적인 신앙으로 타락하며 이기적인 자기신앙으로 변질되는 원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은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해석만 들을 뿐이다. 이건 비극이다. 교리만 믿을 뿐 예수님의 육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해석들 혹은 교리 해설이라는 것이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채 해석만 믿을 뿐이다. 이러니 어찌 피상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세속적 신앙으로 빠져 들지 않겠는가. 기독교의 믿음은 신앙의 대상을 제 삼자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마주하여 바라보는 인격적 대상(You)으로 만나는 것이다. 폴틸리히 설명을 조금 빌리면 궁극적으로 관심하고 집중하여 인격적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을 때는 언제나 제 3자가 아니라 2인자적 입장에서 예수님 앞에서 혹은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의 눈빛, 숨소리, 걸음걸이, 손짓, 악센트까지 느끼며 읽으며 공감해야 한다. 바울 서신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 것이 성경을 대하는 예의다. 그러지 않을 경우 예수님과의 공감 없이, 바울의 생각과는 상관 없이 제 3자 입장에서 자기 이야기를 예수님이나 바울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게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아전인수(我田引水) 신앙으로 달려갈 위험이 매우 크다. 이 러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거나 타락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한 일도 하나님의 뜻이고, 세월호의 비극도 하나님의 귀한 뜻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자기뜻대로의 신앙’이 다 어디로부터 시작되었겠는가? 신앙의 대상을 만나지 않고 해석만 하다보니 여기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학문 연구를 위해 성경을 고문서(古文書)로 이해하여 읽거나 연구할 수 있다. 이는 제 3자적 입장에서 다양하게 분석하고 비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학문하는 목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는 감정이입 없이, 인격적 고려 없이 건조하고 냉정한 관찰자 입장을 갖는 것이 옳다. 그래야만 학문이랄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으로 경전으로서 성경을 읽을 때는 신앙의 인격적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직접 인격을 만나는 태도여야 한다. 그러니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인격적 교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하면서 마치 제 삼자처럼 말을 하고 그 말을 해석하고 있다면 인격적 만남이 지속될 수 있겠는가.
McKelligon canyon, El Paso, Texas
신앙은 신앙의 대상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발전시켜 공감과 일치를 이루어가는 일이다. 직접 만나서 경험하는 느끼는 이해는 제 삼자인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이해와는 근본이 다르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어떤 심정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질문도 해야 하는 것이다. 독서를 하면서 저자와 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또는 누구와 만나 서로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의 몸짓, 표정, 감정의 느낌까지 놓치지 않도록 집중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사이에 예수님과 함께 있고,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게 된다. 이럴 때 관계는 더 깊어지고, 바울의 고백처럼 내 안에 그 분이 사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갈2:20). 요한의 증언처럼 그 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있는 체험을 할 것이다 (요일 4:15). 그러면 성만찬 예식을 통해 고백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처럼 되는 신비적 경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이 학문을 초월하는 신앙의 상태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로 마주함이다. 눈빛도 마주하고, 감정도 마주하며, 몸짓도 말투도 마주하여 보고 느끼는 인격적 관계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복음서를 깊이 독서하는 것이다. 독서에 깊이 빠져본 사람이라면 글을 쓴이와 깊은 대화 혹은 격정적 대화를 경험해봤을 것이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며 소설 속 주인공과 만나보기도 하고 소설 속 장소에 들어가보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독서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인공과 혹은 글쓴이와 공감하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감정이 섞인 육성을 들을 수 있다. 그의 몸짓과 거친 숨결을 느끼며, 먼치 풀풀 일어나는 광야를 함께 걸어볼 수도 있다. 그렇게 만나는 것이 믿음의 상태다. 그다음에 복음서를 쓴 이들들이(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이) 보충하여 설명해주는 말을 참고하는 것이다. 그 다음 바울이 예수님을 설명해주려는 그의 심정과 생각을 느끼고 이해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펴자마자 해석하겠다고 달려드는 행위는 성경을 신앙과는 상관 없이 단순히 기록문서로만 대하겠다는 행위거나, 신앙의 대상을 일대일로 바라보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대상인 예수님을 제 삼자처럼 관찰하거나 구경하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다. 책만 읽을 뿐 주인공과의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대상에 대하여 무례하기가 짝이 없는 행위다. 어찌 이러한 태도를 신앙이라 할 수 있는가. 신앙은 대상을 향한 일대일로 마주하는 헌신인 것이다.
예수님을 해석하려고 덤비지 말라! 감히 해석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말라! 무엇보다 먼저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마음을 열라! 생각을 열라! 귀를 열라! 다시 말하지만 해석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는 순간 당신은 신앙인이 아닐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을 향해 마음도 닫고 눈도 감고 귀도 닫아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설교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려고 덤비지 말라! 당신에게 폭포수처럼 가슴 울리도록 들리는 소리, 혹은 산들바람소리처럼 때로는 계곡의 찬물소리처럼 들려오는 그 분의 음성을 먼저 듣고, 그 분의 가슴을 느끼고 난 다음에 그 모든 것을 전달할 일을 고민하시라! 설교를 듣는 이들도 그렇다. 설교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경 속으로 다시 들어가 직접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느끼고 생각해보시라. 주님은 당신을 일대일로 만나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라. 그리고 직접 그 분을 만나야 함을 잊지 마시라! 다시 말하지만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 분의 말씀을 느끼고 듣는데 집중하시라! 신앙인은 그 분 앞에 온 인격으로 마주서는 사람임을 잊지 마시라!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 (요 4:42)
2014년 6월 10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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