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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사랑과 눈높이

사랑과 눈높이

 

믿음이 사랑하는 행위인 것을 새삼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복음서를 정독한 독자라면, 복음서 전체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사역이 그 분의 이 사랑하는 행위였음을 깨달아 알아차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흔하고 흔한 기독교 신앙의 설명이 사랑이라고 알려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기독교 신앙에 입문했다면, 누구든 우선적으로 관심해야 할 것은 어떻게사랑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세상은 저마다 사랑하려고 난리다. 아니, 사랑받으려고 몸부림이다. 사랑을 하려고 하든,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든 사랑에 대한 열망은 살기 위한 본능에 속한 것이니 사람의 궁극적 관심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욕망의 에너지에 실려 나타나는 사랑의 행위가 많고, 그래서 사랑이라는 근사한 말로 시작하여 비극이라는 고통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이 것은 인생의 비극적 종말과 닿아있는 인간의 심각한 실존적 문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꼭 필요한 인생의 물음이며, 동시에 사랑으로서 믿음을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물음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자기 욕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눈마주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믿음은 눈맞춤이다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사랑은 마주친 눈빛에 사로잡히는 상태다. 이 상태는 나도 너도 없는 사랑의 상태가 되는 것인데,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존재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옆에서 보아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상태에 빠진 사람은 친구들에게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흔히 하는 말, ‘요즘 애인 생겼나봐~~~ 점점 예뻐져…’ 와 같은 말이다. 사랑하면 사람이 달라진다. 맞는 말이다.

 

사랑에 빠지면 너도 나도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랑의 사람이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이기적이지도 않고, 물질적이지도 않으며, 나는 온데 간데 없고 오직 사랑하는 상태의 존재에만 존재하는 나를 발견한다. 새 사람이다(new person. 새 피조물이다(new creation). 새로운 존재다(new being). 이러한 상태의 존재라함은 믿음의 상태요 구원받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자기 욕망과 이기심, 물질적 존재로 소유하는 욕망을 따라 살던 존재가 자신을 내어주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무조건 헌신하는 상태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원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사역 전체를 통해 보여주시고 요구하셨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 편지에서 사랑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4:16).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도 사람이 되고, 사람도 하나님이 되는 한 몸처럼 존재하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순수한 사랑에 빠져 자신을 모두 잃어본 경험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요한의 증언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다. 여기서 이 사랑의 상태, 즉 믿음의 상태에 결정적 에너지 촛점은 눈높이에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전혀 달리 보였던 것은, 나도 너도 없는 새로운 존재의 상태가 되었던 결정적 이유는,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에 빠져 자신을 잃었던 이유는 오직 사랑의 대상을 향한 눈맞춤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의 눈높이 맞춤에 있었던 것이다. 자기 눈높이가 아니라 대상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어서 지금껏 알아왔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 또한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눈높이 맞춤이 결정적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곧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것은 곧 주님과 눈을 마주치는 행위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다 함은 곧 예수님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눈높이 맞추는 일로 행복해져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대상의 눈높이에 맞추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으로 행복하다는 말이다. 자기 눈높이는 이미 잊어버리고 사랑하는 대상의 눈높이에 빠지는 것이다. 이 또한 숨쉬는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의 눈높이 수준이 너무 높아 우리 같은 사람은 도저히 맞출 수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 예수님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진정으로는 예수 믿지 못하겠고 믿는 흉내나 내는 것으로  사랑했다고 말 할 것인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하늘의 눈높이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 사람의 눈높이가 되셨던 분이 아닌가 말이다. 예수님도 육체를 지닌 한 사람으로 한 여인의 자궁에서 잉태되어 태어났고, 친구의 죽음에 안타까워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분이셨다.  그는 사람들이 받는 악마의 시험도 똑같이 받았으며, 체포되던 날 밤 제자들에게 괴로워 죽겠다고 하소연 하셨고, 피눈물 나는 기도를 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제발 이 길을 비켜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분이다. 잡혀가서는 온갖 수모를 당하고 온갖 고통의 고문을 당하시고 처절하게 피흘리고 죽으셨던 분이다. 그 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며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네. 믿지도 않고다만 멀리서 구경꾼처럼 바라 볼 뿐이겠군. 이 게 무슨 사랑이고 믿음이라는 말인가.

 

눈높이란 사물이나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인식하는 또는 이해하는 수준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님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말은 예수님이 보시는 안목과 인식의 수준을 따라 생각하고 이해하며 판단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우라고 하셨다 ( 11:28).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으라고 했다 ( 2:5). 복음서를 읽고 바울 서신을 읽으면 그 모든 내용들은 예수님의 눈높이에 맞추라고 하는 말로 모아진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성례전 성만찬 예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결합하는 의식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 즉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우리의 눈높이?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의 눈높이란 우리의 죄성과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이 세상의 유행과 관습에 의존된 욕망인 것임을 알지 않는가? 그러니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리고 사랑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순간 옛 눈높이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났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요구하셨다. 당신을 따라오려거든 우리가 지니고 살아왔던 눈높이를 포기하라고. 그것은 사랑의 조건이기도 하고 사랑의 결과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 16:24). 전심 전력으로 눈높이 맞추기에 나서라고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22:37).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사는 믿음이란 그 분의 뜻과 하나되어 사는 것이다. 그 분의 눈높이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관계에 빠졌다면 사랑하는 대상의 눈높이에 맞추는 일은 밤이면 별이 뜬다는 사실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초대교회에서 바울은 이 눈높이 문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려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눈높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맞추려고 했던 것이었다. 아직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기 전이었다면 그럴 수 있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 사랑, 이기적 욕망에 의존된 관심집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마의 행위로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기회있을 때마다 사람의 눈높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눈높이에 맞출 것임을 다짐했고, 또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눈높이에 맞출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 1:10).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  2:17).

 

바울의 이같은 안타까움은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더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눈높이에는 시도도 하지 않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시는 분이라고 굳게 믿는지도 모른다. 교회도 다투어 예수님이 당신들 눈높이에 맞추니까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믿으시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의 눈높이를 따라간다는 사실, 이 사실은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모를리 없는 진리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믿음이란 내가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분의 눈길에 사로잡히는 것이니 나는 온데 간데 없고 오직 그 분만이 내 안에 전부가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그래서 바울도 고백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 2:20).  

 

예수님은 당신의 눈높이를 우리 죄인에게 맞추어 죽으셨다.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았다면 그럴 일은 아무 없는 것이다. 다 사랑때문이었다. 우리가 그 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먼저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 그 분의 눈높이에 맞추는 사랑 행위다. 그 사랑을 어찌 죽도록 할 수 없겠는가.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치고 그 눈길에 사로잡혔다면, 그리고 사랑하게 되었다면 우리의 눈높이를 그 분에게 맞추는 일은 내일아침 해가 뜬다는 사실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2014년 4월 23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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