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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믿음은 고민이다

믿음은 고민이다

 

자주 만나는 목사님 한 분이 최근에 새롭게 신앙고백을 하면서 날마다 회개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지금까지 잘되고 복되어 잘 사는 인생을 위해, 흔히 말하는 세상적 가치를 따라 성공을 추구하는 목회, 그 목사님의 말을 빌리면 지금까지 계속 유행하고 있는 번영의 신학을 따라 믿고 목해해왔던 과거를 통절히 회개한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따라 가기로 한 후부터는 지금까지 아무 걸림이 없었던 모든 일들이 하나 하나 걸려서 힘들고 고민스럽다 했다. 그동안 고민 없이 열심히 설교해왔던 내용들도 하나 하나 마음에 거슬리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아무 문제 의식 없이 지내왔던 자신의 생각과 목회 방식들도 눈에 거슬려 보여지기 시작했고, 다른 목회자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너무 달라져서 하나 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쳐가는 일이 많이 힘들다고 하였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으며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곰곰히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는 믿음의 길은 고독하게 고민하며 가는 길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우선 예수님도 참 많은 고민을 하며 지독하게 고독했던 분이셨다. 열 두 명의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장차 교회의 기둥으로 다듬어 놓으셨으니 예수님께서는 행복하고 든든하셨을까? 그런 증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올리브산 혹은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곳에서 목숨을 건 기도를 제자들과 함께 했었다. 그 날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마태는 이렇게 증언한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 26:38).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 26:39). 이 기도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스러운 고민이 있었겠는가를 느끼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그의 시 십자가에서 이렇게 예수님을 고백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
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
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자 어느날 불쑥 찾아온 하나님은 그에게 엄청난 약속도 하셨지만, 또 엄청난 요구도 하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온 삶의 터전 하란과 부모 형제 친척들을 떠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새 땅으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어떤 지도가 있는 것도, 어디 어디에 땅을 마련해 두었다는 약속이 있는 것도 없이 막연하게 믿고 떠나라 하는데 아브라함의 고민은 얼마나 컷을까? 100살 때까지 아들을 기다려야 했던 고민은 또 어땠을까?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라 했을 때 아브라함의 고민은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 일일이 아브라함의 고민을 이야기 하자면 수도 없이 많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이러한 고민의 길을 갔고, 그렇게 고민하면서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아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바울은 어땠을까? 그가 유대인들 중에 유대인이라며 명문가를 자랑하고 학식을 자랑했던 사람이 기독교인들의 잡아 끌고 오겠다며 기세등등하게 떠났던 그 길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철저한 예수 신앙인, 십자가 복음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은 아무 고민 없이 된 일이 아니다. 그럴만큼 그 바울 자신의 사상이나, 유대교에 대한 헌신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바울은 강한 빛과 신비한 음성을 듣고 난 후 아무 고민이 없었을까? 그가 그러한 체험을 한 후 3년이 지나서야 기독교 교회 안으로 등장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언했던 점은 그 3년의 기간이 결코 간단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믿음의 길을 가면서도 여전히 괴롭고 고민하며 가고 있다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7:19-24).

 

 

사진/ at yard of Korean UMC in El Paso 

 

기독교 믿음의 원천은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 믿음의 수액은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어가면서 한 절 한 절마다 기쁨의 환호를 부를 수 있는가? 물론 진리를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을 느낄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손뼉을 치며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침도 수많은 우리의 고민을 끌고 온다. 나는 지금까지 35년 가까이 성경을 읽어왔고, 30년 여 동안 목회자로서 성경을 연구하며 설교했왔지만 고민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적은 없다. 그 고민은 예수님의 말씀이 내 가슴을 치고 들어와 요구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독서하고 연구하며 느끼는 황홀감의 극치는 이 고민의 쓴 잔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 한 구절도 가볍게 읽을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고민은 더 깊어질 것이다,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믿음에서 고민의 쓴맛은 어둠 속에 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단 맛을 우러낸다, 마치 쓴 설록차를 마신 후 혓바닥에 잔잔하게 젹셔오는 단맛처럼 말이다. 고민 없는 아멘과 할렐루야는 허공을 치고 메아리 없이 사라지는 소리일 뿐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앞에서, 구원이냐 멸망이냐 하는 결정 앞에서, 그리고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는 신앙이 어찌 아무 고민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힌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면서, 자칫하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를 교묘한 악마의 세상에 살면서 갈등과 고민 없이 믿음의 길은 간다면 위선자이거나, 진리를 아직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죄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힘들어하며, 날마다 십자가에 죄를 못박아도 여전히 죽여야 할 내 자신의 모습은 줄을 서서 나타난다. 이렇게 문제 많고 연약한 존재다. 그러니 고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믿음이 자라고 익어가며 여물어가는 사람이다. 고민할수록 믿음은 성숙해지고, 믿음은 확고해진다. 예수님과 세상의 유행과 사람의 욕망 사이에서 심각히 고민해보라, 그리고 믿음이 최후 승리를 거둔 깃발을 계속 꽂아보시라, 그러면 고민의 쓴 맛이 환희의 단 맛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고민은 믿음이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2014년 3월 30일 사순절 넷째 주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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