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레슬링 종목이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되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올림픽 위원회가 내세운 이유가 ‘재미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대올림픽 5종 경기로 지금까지 지켜온 올림픽 기본 종목이 퇴출당한 이유가 참으로 황당하다. 지금껏 인기를 위해 운동을 했다는 말이 되는데 올림픽 정신을 쓰레기 통에 던져넣는 소리다.
나도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나만이 아니라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인정한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비인기 종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들어가자 마자 미식 축구를 하겠다 했다. 너무 위험한 것이라고 반대를 했더니 더 위험해보이는 레슬링부에 들어갔다. 4년 내내 레슬링 선수가 되어 열심히 하여 캡틴까지 하며 즐거워했다. 한번은 레슬링이 재미 있냐? 하고 물었더니, “아빠, 3분 안에 승부를 가른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 그게 얼마나 짜릿한지….”
그 맛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쩌 재미 있다 없다 할 수 있겠냐 생각하며 레슬링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들은 4년 동안 공부를 마치고 연습하며 시합이 있는 날은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지만, 때로는 체중 감량을 위해 밥은 먹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도 행복해 했다. 모든 운동도 그럴 것이다. 운동의 깊은 맛을 알기 전에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왜 그리 힘들게 하느냐고 할 지도 모른다.
재미가 우리 시대 가치관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 하다. 재미 없는 것은 다 퇴출의 압박을 받는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그 재미도 우리 아들 말처럼 2-3분 안에 결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개를 돌려버린다. 처음부터 무조건 재미 있어야 하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재미 있어야 하며 재미 없는 것은 쓰레기 취급받는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재미 있는 것일까?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니까 재미 있어 보임직 하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에서는 기쁘고 즐거운 생활, 신나고 흥분된 감정, 짜릿한 쾌감이 일어나는 노래와 음악을 동원하고 쇼를 제공하며 복음은 즐겁고 신나는 것처럼 홍보하는 경우도 많은 듯 하다. 그렇게 하여 날마다 행복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신나는 삶을 산다면 나무랄 필요가 없이 박수를 쳐 줄만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 의문인 것은 정말 복음이 기쁘고 즐거워서 그러는 걸까?
복음은 결코 사람에게 감정적 흥분을 일으키고 날마다 복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즐겁고 기쁜 감정이 흘러나오게 하는 노래방 기계 같은 게 아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이 복음이다. 죄와 직면하여 부끄럽고 불편한 진실, 자신이 더럽고 잔인한 죄인임을 발견하고 고백하는 회개가 복음이며, 그 회개를 통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 복음이다. 이러기까지 자기를 부정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못 박아 죽이며 피흘리는 아픔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군하며 경험하는 자유의 기쁨이다. 세상이 주는 그런 즐거움과 기쁨이 아니다. 사람의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쾌감이 아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생명수를 길어 올려 마시고 그 물 기운이 온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쾌감이다.
복음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다. 비슷하지도 않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신 것처럼 복음의 기쁨과 즐거움도 전혀 다른 것이다. 자신의 깊은 죄를 찾아내고, 온몸 깊숙하게 뿌리 내린 죄의 뿌리를 잘라내어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진리를 깨달아 알고 그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기쁨은 먼지 풀풀 일어나는 사막을 걸어도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깊은 샘물을 경험하지 않고는 복음이 피하고 싶고 부담이 되며 고통이 되는 것일 뿐이다. 신앙의 세속화는 이 때문에 날마다 확산되는 것이다. 더 쉽게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길을 찾기 때문이다. 3분 안에 재미 없으면 마음이 떠나버리는 세상이다.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은 뭐라 하셨을까? 애초부터 당신의 복음은 재미 없다고 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씀을 던지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 참으로 썰렁하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이 어디인가. 더구나 율법학자가 제자가 되겠다는데 환영은 커녕 이렇게 썰렁하게 응답하시다니…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막 8:34). 따르려고 마음 먹었다가도 멈칫하며 망설이게 만들 그런 말씀이 아닌가. 한 가지만 더 소개하자. 하루는 부자이고 청년이며 높은 관직에 있는 모자랄 게 없어보이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냐며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길을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어릴적부터 철저하게 지켜왔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는데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그는 얼굴을 어두워지고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가버리고 말았다(눅 18).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면 과연 몇 사람이 예수님 곁에 남아있겠다고 나설까?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더러 떠나라고 소릴 지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을 찾고 즐기려 하는 것은 다 좋은데 문제는 무엇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복음은 무엇을 기쁘다고 하는 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를 통한 영혼의 기쁨을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의문이다. 3분 안에 웃겨주고 즐겁게 해 주려면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 감각의 말초 신경을 자극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오감을 자극할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복음은 아주 재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복음이 재미 없다고 감각적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복음이라고 우기지 말고, 레슬링 선수가 땀을 흘리며 훈련하여 3분 안에 상대를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키우며 짜릿한 기쁨을 경험하듯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아 내 안의 샘에서 터져나오는 생수를 가슴벅차게 받아마실 수 있는 훈련을 해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거기까지만 힘들어도 갈 수 있다면 복음만큼 짜릿하고 기쁘며 즐거운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단 이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만은 미리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잘 참고 견디면 금메달을 따게 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 7:13-14)
2013년 7월 3일
'내일 아침'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