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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2부

다섯 번 째 기도(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

다섯 번 째 기도(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

   

이 죄도 역시 율법적 판단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판단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가 사람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죄의 문제가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 그런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만든 창작물에 대한 애착은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기 분신처럼 여길 정도로 크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애착을 갖는 존재가 사람임을 증거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적 대상이며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창조자에게도 곧 고통을 주는 것이 된다. 여러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을 이런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열 손 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 가락이 있는가?’

 

마태복음 25장의 내용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들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40)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 우리가 이 비유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과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하며 무시당하는 사람을 동일시 했다는 점이다. 창세기의 증언을 이해한다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다.

   

 

사진/ Cloudcroft city/ New Mexico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 1:26) 이는 사람의 존재 가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해준다. 사람의 인격적 가치와 인간이 지니는 인권적 존엄성은 하나님의 인격으로부터 왔다는 증언이다. ‘천부적 인권이라는 헌법용어가 주는 의미 역시 인간의 존엄한 가치가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사람이 이를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인격으로부터 온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고통이 된다. 사람과의 관계성을 파괴하고 단절을 만든다면, 이 또한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하며 단절을 불러오게 한다. 인간과의 관계단절과 소통단절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로 이어지며 하나님과 죄의 상태가 된다.   

   

이사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이사야 1:15-17)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은 곧 당신의 일로 여기시는 생생한 음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마치 당신의 일처럼 민감하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율법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6:5)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19:18)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37-40)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죄의 관계, 죄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처럼 심각히 여기며,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이용하며 억압하고 해하는 죄악된 상황에 존재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14년 1월 23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