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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2부

다섯 번 째 기도(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다섯 번 째 기도(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kai. a;fej h`mi/n ta. ovfeilh,mata h`mw/n( w`j kai. h`mei/j avfh,kamen toi/j ovfeile,taij h`mw/n\

   

우리가 기도해야 할 다섯 번 째 관심사는 죄의 용서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용서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용서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가 용서해준 것처럼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접속사 w`j (as)로 연결하였다. 

    

죄와 용서는 기독교 메시지의 주된 관심사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1-2장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아름답게 소개된다. 흔히 낙원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에덴동산과 아담과 하와 이야기도 이 곳에 있다. 그러나 3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의 죄와 타락 그리고 그에 따른 고난의 뿌리를 다루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후 인간의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만큼 죄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관심하는 죄는 두 가지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지은 죄가 있으며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어 하나님께 죄가 되는 죄가 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용서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방식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 사이의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인간의 죄를 알아야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를 이해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된다. 죄를 모르는데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사진/ on McCombs St., El Paso, Texas 

 

    하나님 앞에서의 죄

   

흔히 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법이 죄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 죄가 될 수 있는 최소치를 만들어 두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한다. 율법을 지키면 죄가 없고 율법을 어기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것일까? 이는 법을 어기지 않았다 하여 죄가 없을까? 하는 물음과 닮았다. 법망을 벗어났다 하여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외친 설교를 보거나 예수께서 당시 율법준수의 전문가들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위선자들이라고 무섭게 비판하셨던 점을 보면 율법준수가 곧 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에 숨어 있는 죄를 보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들어보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24) 이사야서가 위선적 신앙을 고발한 내용이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이사야 29:13)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적 형식이나 계율을 따라 판단하자면 깨끗하고 무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내면에 자리한 탐욕은 죄악덩어리라고 고발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23:26) 그리스도께서 죄를 가르치실 때 종교적 계율이 아니라 내면 속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를  겨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동일하다. 그들이 온갖 종교적 형식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건한 모양을 지키지만 그것은 종교일 뿐 그들의 마음은 정작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동떨어진 곳에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사야서의 고발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이미 깨어진 그 관계성을 꾸미려 종교적 형식을 소품으로 이용하는 타락한 종교의 모습을 폭로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성이 깨어지고 단절된 상태에서 시작 된다. 하나님과 소통과 관계가 단절되면 결국 악마와 관계하고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한계다. 선하거나 아니면 악하거나.    

    

창세기 3장은 에덴동산의 비극을 다룬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 사이의 비극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고 함께 살았다. (창세기 3:8) 그런데 이렇게 친밀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국을 맞게 된다.

 

이 비극의 시작은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시작된 것이다. 그 유혹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 싶은 욕망이다.’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충동과 유혹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빗나간 욕망이다. 하나님을 향한 죄는 이렇게 출발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죄 라는 단어를 '하마르티아'(a`marti,aj)로 사용하는데(11:4) 이 단어의 어원은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것을 뜻하는 것이다. 즉 빗나간 결과를 나타내는 단어를 죄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해석하여 이해하자면 하나님과 관계가 어긋나거나 하나님의 뜻을 빗나가는 상태를 죄로 보는 것이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일관되게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잘못된 관계, 빗나간 관계이다. 그것이 죄가 되어 인간의 문제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하며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2014년 1월 19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