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고후 1:1-24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고후1:5-6).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는 첫 편지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첫번째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가 지닌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던 바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또다른 문제로 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히 베어나도록 글을 썼다.
바울은 인사말을 쓰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도 바울 자신이 겪는 것처럼 고통 중에 있음을 확인해준다. 이를 통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함께 고난을 겪고 있으며, 고린도 교회도 바울이 겪는 고난을 생각하며 위로받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고린도 교회공동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소아시아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를 고린도 교회가 알아주기를 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8-9). 바울의 간절한 심정이 절절하게 흘러넘친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일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호소하는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시아’라고 하는 소아시아의 에베소를 중심한 넓은 지역에서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바울에게 일어났던 사건으로서 사도행전 19:23-40에 기록된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에베소 사람들 중에 그들의 신 아데미와 신전 모형을 만들을 돈을 벌던 은장이가 바울이 우상이라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데미 신을 떠나고 있으며, 자신들의 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동료를 잡고 바울을 공격하려고 소동을 일으켰던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만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을 특정하여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바울 사역 전체가 고난의 연속임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이 편지 11장에서 자신이 직접 밝히고 있는 그의 고난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고후 11:23-28). 바울 자신이 세운 교회 모두를 향해 걱정하는 마음의 아픔을 바울은 알아주기를 바란다.
앞서 바울이 말했던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는 그가 지금까지 당해왔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그 고통스러웠던 감정들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터져나온 듯 한다. 심지어 자신이 세웠던 교회들로부터 전해오는 숱한 문제들 때문에 걱정하는 자신의 심정이 얼마나 무겁고 힘든지 숨기지 않는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며,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힘든 고난의 행진임을 알아달라고 호소한다. 이유는 철없는 아이처럼 휘청거리는 교회의 소식을 듣는 바울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보여줌으로써 교회가 바로 서려는 노력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감정이 철철 넘치는 글로 시작하는 바울의 심정은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의 사역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반 바울 정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의 감정 표현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을 대적하는 분위기가 갈라디아 교회 이상으로 심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는 갈라디아서를 비교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 심정을 바울은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 목숨을 걸고서, 나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렵니다. 내가 아직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 (23-24).
바울의 이같은 고백은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고 동시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격려하여 자신이 뿌린 복음을 지켜가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4). 박해의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끓는 사랑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는 통로다.
오늘도 여전히, 교회는 환난 가운데 있고, 사탄과 악마들이 몰려들어 교회를 휘저으며 고통 속에 신음하게 만든다. 바울의 애통함이 오늘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의 애통함과 만나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개역개정4판).
2015년 3월 31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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