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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중심을 잡고 살기

 

중심을 잡고 살기

 

 

  

우리 모두는 신앙에서나 삶에서나 양 극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좌익이 있는가 하면 우익의 입장이 있고, 악이 있는가 하면 선이 있다. 왼쪽이 있으면 오른 쪽이 있듯이, 배부름이 있으면 배고픔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는 것처럼, 어제는 희망적이었다가 오늘은 절망적인 날이 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자리에는 이 두 자리가 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극과 극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 희망이 없고 절망의 감정만 쌓여간다면, 우울해지는 기분에 눌려 삶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나치게 희망에만 충만하여 절망과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또한 현실적인 삶을 살 수 없고, 뜬구름 잡는 사람처럼 허황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양 극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한다.

 

감정과 생각은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데 결정적이다. 이러한 감정의 상태와 생각이 늘 변할 수도 있고, 전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너무 자주 변하면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어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너무 변하지 않으면 재미 없고 고리타분하며 아무런 변화도 기대도 할 수 없는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도 있다. 이렇듯이 우리 모두는 이 양극에서 중심을 잡고 사는 기술을 지녀야 한다.

 

동양철학서 중에 ‘중용’(中庸)이라는 책이 있는데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불리고 있다. 동양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용’은 어는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게 많거나 적지 않게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의 마음이 본래는 하늘로부터 평상심(平常心)을 받았으나 세상사에서 이 평상심을 잃고 좌로나 우로 치우쳐 인간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용을 이해할 때,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중립을 지키겠다는 말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양 극단이 옳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순수한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다. 참과 진리를 놓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 5:32), 이 또한 이 쪽과 저 쪽 사이에 가치중립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가라는 뜻이다. 중용도 성경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진리의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중심을 잡고 가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는 온갖 이설들이 난무하고 악의 유혹이 심하여,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살다 보면 갈 지()자 처럼 인생을 망칠 수 있게 때문이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중용을 지켜 평상심을 갖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 것이 우리의 한계다. 중심을 잡고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경험할 때 흔히 하는 말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딱히 이 것이라고 판단하기가 애매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판단을 유보하고 거리를 두어야 할 때도 많다.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세상의 일이 똑 떨어지도록 판단을 하기가 어려운 일도 많다는 것을.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이렇게 애매하고 헛갈려 어떤 입장에 서야 할 지 난감한 경우는 인생을 살다 보면 쉽게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의 판단부족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재판정에서 판사들이 판결을 내릴 때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 고심에 고심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인생에서도 이러한 경우는 종종 만나게 된다. 이 것은 진리에 대한 고민과 같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고뇌는 힘들어도 값진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사람이 비겁해진다는 말을 한다. 비겁하다는 말은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불의를 행하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피해를 외면하거나, 거짓증거로 자기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를 말한다. 아예 양심도 체면도 그리고 염치도 없는 사람에게는 붙여질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참된 가치에 고민은 있는 것이다. 눈치를 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하는 태도는 결코 중용도 아니고 체면이나 양심적이지도 않다.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 진리에 대한 고민 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판단의 최우선이 될 때, 옳고 그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여 이익을 취하는 길로 가는 것은 분명히 떳떳하지 못한 인생이다.  

 

예수님은 완벽한 중용(中庸)의 인격이셨다. 하늘로부터 왔으나 땅에 사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아들로 사셨으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세상 사이에 사신 분이셨지만, 좌도 우도 아닌 중간에 서신 분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셔서, 하나님을 향하셨으며, 사람을 위하여 몸을 내어놓으심으로써 중용의 삶을 완성하셨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중용을 지켰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 많은 세상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님 편에만 서지 않았다. 불쌍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셨으며 절망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으며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셨다. 신약성서는 이 사실에 대한 증거다. 그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위로와 격려를 통해 새 삶을 시작하도록 이끄셨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불의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바리새인이나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지닌 위선을 고발하고 사정없이 심판하셨던 것이다. 이 또한 성서적 진실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중보자로서 중심을 확실하게 지켰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 사실은 진리를 붙잡되 사랑을 품는 것을 뜻한다. 율법을 붙들되 사랑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불쌍한 이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모델이다. 하나님 앞에 중심 잡고 사는 것과, 세상에 중심잡고 사는 것은 그 길은 결과가 명확하게 다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중심잡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 중심 잡고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2013년 10월 18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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