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코네티컷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졸업식 후기’를 들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학우들 중에 누구는 어느 대학으로 갔고, 또 누구는 어디 대학에 갔다는 이야기를 하다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R’이라는 한 학생 이야기가 나왔다.
그 학생 ‘R’이 마지막 학기 중에 과제물 ‘에세이’를 선생님께 제출하였는데, 그 에세이를 읽어본 선생님이 표절된 부분을 발견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써 가다 다른 사람의 글을 통째로 옮겨 놓고서 아무 설명 없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넘어간 것이다. 담당 선생님은 이 사실을 학교에 알렸고, 학교는 R 에게 학칙을 적용해 벌을 내렸다. 졸업장은 집으로 보내주겠지만, 졸업식에는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 졸업식에 나올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벌이 그것만은 아니었다. 학교는 규칙에 따라 R이 표절의 죄가 있어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을 R이 지원했던 모든 대학에 알렸다. 그 결과 대학 합격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다행히도 한 대학교가 그 학생을 받아주어서 대학 진학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고등학생이 한 순간의 실수로 지난 4년 동안 공부해온 과정을 마치고 축하받는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마음 아프게 들렸다. 부모들도 얼마나 가슴아픈 시간을 겪어야 했을까? 또한 학교가 내린 벌이 너무 가혹하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학생을 불러서 야단을 치고 난 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고 용서해줘도 될 일이 아니었나 하는 같은 부모 입장에서 원망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R에게는 너무나 뼈아프지만,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배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 일을 평생 잊지 않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내 생각을 딸에게 말해주었다. 인생 공부는 본래 비싼 법이라는 잔소리도 함께.
종종 한국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들 중에 고위 공직에 나가는 유명한 이들의 박사 논문에서 표절이 수두룩하게 발견된다는 이야기와, 관행적으로 다 그런거 아니냐는 식의 천연덕스러운 변명도 듣는다. 한국사회의 이같은 ‘너그러움’과 ‘관대함’(?)에 비하면, 딸 아이의 학교가 아직은 어리다 할 수 있는 한 고등학생에게 내린 추상같은 벌이야말로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다 나는 R에게 가혹하리만큼 처벌을 한 담당 선생님과 학교, 그리고 학교의 보고를 받고 합격취소를 결정한 대학들에게 눈물이 핑돌만큼 감격한다. 그리고 R을 받아준 대학, 그의 실수가 있음에도 너그럽게 받아준 그 대학에도 감사한다. 이와같이 죄에 대해 가혹하게 벌을 내리면서도, 한 모통이에서는 용서하고 받아주는 여유가 남아 있는 이 사회에 살고 있음을 눈물겹게 감사한다. 이러한 역동이 이 사회를 사람이 숨쉬며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지켜가는 게 아닐까싶다.
‘표절’은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고, 속임수로 말하는 것이며, 문서를 위조하는 것이다. 이 행위에 모든 범죄와 나쁜 행위의 세포가 자라고 있다. 이 사실은 명백하다. 만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어느 공동체나, 어느 사람이나 이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대항하여 막으면서 단호하게 벌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만들어가는 문명의 가치를 지키고자 한다. 때문에 한 사회에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표절’ 이야기는 그 사회의 도덕적 가치와 문명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試金石)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교에서 수여하는 박사라는 학위 논문에서라면 한 사회의 리더를 길러내는 산실의 윤리적 수준의 비참함을 웅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들의 일상적 거짓말들은 학위 논문 표절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서를 조작하고, 진실을 조작하며, 언론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들은 모두 ‘사기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버젓이 얼굴을 들고 만인 앞에 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한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 하는 것이라면, 그러고도 이런 일로 아무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문명사회라고 말하기 어렵다.
국경도시에 살다보니 가끔 법을 어겨 벌을 받는 한국인과 상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글을 쓰다보니 두 케이스가 떠오른다. 한 번은 한국과 멕시코와 연계된 문서위조단에게 위조문서를 구입하여 국경을 넘다 체포된 젊은 이를 상담한 적이 있다. ‘문서위조’와 함께 ‘거짓말’이라는 죄목이 그의 조서에 적혀있었다. 놀라운 것은 재판정에 들어가면서도 한국인 변호사가 자신을 석방시켜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재수 없이 걸려서 이렇게 되었지… 돈으로 자신이 석방될 수 있다’는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지극히 한국적 믿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결국 그가 기다리던 한국변호사가 아니라, 나에게 도움을 청해온 미국인 국선변호사와 함께 재판을 받아야 했다. 또다른 한 경우도 역시 불법 행위로 체포된 한 젊은이였는데… 자신의 행위가 불법인 걸 알지만 석방되고 나면 또 그 일을 할 거라며, 조심해서 하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천연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흔히 들리는 말 ‘단속을 잘 피하면’ 하는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불법이지만 피할 길이 얼마든지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 사회 시스템의 어두운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 어둠의 사회 시스템은 정치인과 관료들의 타락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부모님 혹은 선생님과 어른들로부터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을 많이 듣고 자랐다. 조금이라도 아주 작은 거짓말을 하거나 속임수를 썼다가는 매서운 회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거짓말이라면 입에 담을 수 없도록 징벌하며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며 머리와 가슴에 새겨넣었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엄한 도덕 교육이었고 윤리적 자아를 키우는 회초리였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이 회초리가 없어지고, 무슨 수를 쓰던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러기 위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러기 위해 더 비굴하고 야비하게 동료를 배신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며, 힘을 숭상하고 돈을 열망하는 사회적 풍토가 견고하게 자리잡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탄식이 나온다.
제자의 표절을 슬쩍 눈감아주거나, 정 양심에 걸리면 F 점수를 주며 슬쩍 비켜갈 수도 있었을 그 선생님이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했던 그 심정을 나는 이해할 것같다. R이 지원하여 합격한 학교들에게까지는 알리지 않고, 학교 내부의 징계로 끝내고 조용하게 지나갈 수도 있었을 학교가 엄중한 회초리를 꺼내들 때 내부적으로 겪었을 갈등과 고민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그리고 한 마디 더, 그들이 결국 이 사회의 밑뿌리를 건강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 구절을 읽으며 세상이 좀더 정의롭고 밝아지기를 소망해본다.
“진실한 말은 영원히 남지만, 거짓말은 한순간만 통할 뿐이다. 악을 꾀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속임수가 들어 있지만, 평화를 꾀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다” (잠언12:19-20).
2014년 6월 17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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