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로?
‘믿음’, ‘죄’, ‘용서’ 등과 같이 ‘은혜’는 기독교 신앙을 나타내는 핵심 단어이다. 그러나 그 사용에 있어서는 ‘믿음’이라는 단어처럼 많이 오용되고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훼손하기도 한다.
은혜라는 단어는 신구약 공히 어떤 조건이나 대가를 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베푸는 호의라는 뜻을 담아 사용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이 세상을 향해 당신의 선한 관심과 사랑을 드러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구약성서에서보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특별히 바울이 서신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나타내는데 ‘은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 전서 5:9-10에 나오는 고백이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에서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와 쓰임새를 이해할 수 있는 몇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그 인생에 개입한 일(계시와 오심). 둘째, 하나님께서 바울이 교회 박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사실 (선택과 관계성). 셋째,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심(하나님의 사용하심과 도우심). 넷째는 죄에 대한 용서이다 (박해자를 불러 사용하심).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의미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부르셔서 당신을 나타내신 일, 수많은 예언자들을 불러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 백성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야말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고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했으며, 들판의 양치기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그리스도 탄생의 메시지를 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주는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함께 하심, ‘임마누엘’로 나타난다. 이처럼 당신을 사람 가운데 드러내는 계시, 이것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맞춰 사람 속으로 들어와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바울처럼 인생의 길을 180도 바꿔버리기도 하시며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생에 개입하시어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에게 합당한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은 더 적극적인 은혜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상대로 인격적 관계성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등과 같은 고백은 죄인인 사람에게는 놀라운 은혜다. 이 새로운 관계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호의가 바로 은혜다. 이 것 또한 사람의 의지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에 따라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택 받은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먼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은혜는 아무 한 것 없이 주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더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신다는 고백을 한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사역자로서 부르시고,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한다. 이는 성령의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 가운데 임재하는 은혜다. 바울도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전 12: 4-7).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신종종파(?)가 유대교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하는데 앞장 섰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기독교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파하도록 사용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한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고린도전서 15:10). 바울은 자신의 사역 전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일이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공적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용서와 화해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바울은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죄의 용서와 화해의 길이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골1:20-22).
인간의 죄와 용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는 순간 자신의 죄 문제를 이해하고 회개를 할 줄 알며 용서의 은혜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적 각성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성령의 도움이 있기 전까지는 여전히 미몽의 상태처럼 알 듯 모를 듯하며 교회생활을 한다. 그러다 실수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한 자각과 통렬한 회개를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롬 5:20) 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죄가 많다는 것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와 허물을 많이 깨닫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죄를 모르면 용서도 모른다. 죄가 큰 것을 알면 용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안다. 그래서 죄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만큼 회개도 크며 은혜도 크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무게를 크게 이해하는만큼 은혜의 무게가 커진다.
종교개혁운동이 ‘오직 은혜’(Sola Gratia)라는 말을 했을 때, 믿음은 없이 행위와 공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호의(사랑)로 구원에 이른다는 원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율법의 행위를 내세워 구원을 얻는다는 자기공로적 과시를 봉쇄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자기 공로에 대한 유혹에 약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두고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다하여 믿음의 선한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치 숨 쉬는데는 물이 아니라 공기가 필요하다고 했다하여 사람은 물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은혜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교만함 막고자 함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은혜로운 예배와 찬양’ ‘은혜로운 설교’ ‘은혜로운 말’ ‘설교에 은혜받았습니다’ ‘은혜롭게 합시다’와 같은 말이 과연 ‘은혜’라는 본 뜻게 맞게 적절히 사용되고 있는지 심사숙고 할 필요가 있다. 은혜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사람이 선호하는 만족에 의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신앙이 세속화의길을 걸어가는 첩경이고, 종교개혁운동이 ‘오직 은혜’를 말했던 목적을 훼손하는 것이다.
2013년 1월 6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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