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2부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과 하늘나라

내일아침 2013. 12. 3. 06:41

교회가 가르쳐야 할 여덟 가지 복 (8)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과 하늘나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덟 번 째 복은 를 위하여 고난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복을 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은 사람을 향한 그 분의 관심이다. 따라서 여덟 째 복은 를 위해 힘쓰기 때문에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오는 박해와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이다. 의를 이루고 지키기 위해 자기 희생과 목숨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견디면서 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여덟 가지 복 가운데 반복되는 것이 있다. 첫 번째 복과 마지막 여덟 째 복이 하늘나라로서 동일한 복이다. 서로 조건은 달라도 복의 내용은 동일하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복 중에 하늘나라의 복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하늘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핵심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늘나라의 개념을 이해하는 일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하늘나라를 얻는 조건인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일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고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6:33).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며 구하여야 할 것은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주어진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복으로 받게 될 조건인 의(righteousness)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justice)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올바름을 행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관계에서 지켜 행해야 할 의가 있다. 구약성경은 사회적 관계에서 지켜야 할 의에 세세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적 평화는 이 의를 지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또 신앙의 계약을 지키는 의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계약의 신앙으로 출발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이 그러하고, 예수님도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통해 새로운 계약을 맺고자 하셨던, 말 그대로 신약(新約)이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의고, 하나님의 약속을 파기하고 배신하는 것이 불의다. 그리고 법정 용어로서 의가 있다. 법정에서는 죄를 짓고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고 심판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 이 때 재판장이 판결을 하여 죄인 된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고, 죄가 없다고 무죄로 선언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심판하신다. 이 심판에서 죄의 형벌을 면제 받아 구원받으면 의인이 되는데,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주제가 된다.  하나님의 의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윤리적 행위를 낳는다. 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윤리적 행위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이고, 그 윤리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 이 것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여덟 째 복이다. 그런데 이 윤리적 행동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저항에 부디친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지키려는 윤리적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거나, 또는 거센 저항을 받아 괴로움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유를 통해 넓은 대로로 달려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고, 작고 좁아서 가기 힘든 길은 사람들이 피하지만, 그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 7:13-14).    

   

 

   사진/ E. B. Taulbee Dr., El Paso, Texas

 

 

기독교신앙에서 하늘나라 이야기를 뺀다면 사실 속 빈 강정처럼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하늘나라를 바라고 소망하지 않는 신앙은 속 빈 강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를 소망해야 한다. 또한 그 하늘나라의 복을 받기 위해 기꺼이 의를 위해 고난 받는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이 고통스럽고 무섭다 하여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복을 받지 못한다면 헛되고 헛된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조건으로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셨다 ( 16:24).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조건에서 걸려 넘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실패하기도 한다. 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가 없어서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했던 것처럼, 편하고 안락한 신앙을 위해 넓은 대로를 찾으며, 좁고 힘든 길을 외면하려는 사람은 편하고 안락한 길을 위해 기꺼이 의를 포기하는 길을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확인하신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교회가 세속화 될수록 십자가와 회개라는 말을 듣기 어렵다. 희생과 고난이라는 단어를 피하려 한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예배하며 즐기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하늘 나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늘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거룩한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존재적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는 핍박과 박해, 고난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여덟 가지 복을 마치며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세상에 복을 주시는 분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심판하고 벌 주시는 분으로도 증언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복 받는 길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벌이 아니라 복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는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신다. 이 복을 누리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 세상에서의 하늘나라가 된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이 원하는 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복을 가르쳐야 하고, 교회에 나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을 배우고 이해하며 터득하여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신으로 빠져서 맹목적이고 자기 중심의 신앙이 되고 말 것이다.

 

2013년 12월 2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