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1부

율법을 완성하는 사역

내일아침 2013. 8. 12. 05:38

율법을 완성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이렇게 가르쳤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마태복음 5:17). 당시 율법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태도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을 본 사람들이 예수께서 율법을 반대하거나, 율법에 도전하며 없애려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위들은 당시 율법사회에 충격적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기거나 도전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로부터 왔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출애굽(이집트 대탈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세워진 민족공동체이며 하나님 신앙의 공동체다. 이 공동체가 보존해온 역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고, 율법인 구약성경을 기독교도 신약성서와 함께 경전으로 삼고 있다.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가치가 구약성서의 율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는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다는 자부심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지키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자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신앙 공동체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모세의 오경’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책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민족공동체를 수립한 이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 윤리의 규범이 되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자의식과 고백을 통해 형성된 구약의 율법신앙을 기독교신앙의 원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기독교신앙이 율법 신앙인 유대교와 다른 점도 이해해야 한다. 이는 기독교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율법신앙이 완성 되었다고 이해한다는 점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유대교적 유산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구약 성경의 약속이 성취된 메시야로 이해한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공동체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인격적 몸을 이루는 신앙공동체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율법의 완성을 이루는 공동체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 합당하며 옳은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밝혔다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에 도전과 자의식을 심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선언을 -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이해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예수의 가르침을 율법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율법을 무력화시키려는 반동이라고 여겼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율법을 파괴하고 무력화시키려 한다고 믿거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오해이거나, 오히려 의도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중들이 거부감을 갖게 하여, 대중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악의적 의도를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가르침과 행위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오해하는 이들에게는 바른 이해를 주고 복음을 강조하며, 율법 무용론을 펴는 이들에게는 율법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주는 일거양득의 가르침이다. 이는 교회가 율법과 복음의 균형성을 지켜 나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신앙의 이론적 토대가 형성되던 초기 교회는 유대주의로 몸살을 앓았다. 우리는 바울 서신을 통해 그가 율법주의와 투쟁을 전개했던 투사적 인물이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유대주의는 율법은 가졌으나 행함이 없어 율법의 형식을 우상처럼 믿는 교조적인 종교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당시 율법주의 신앙에 대한 정직한 호칭이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가르침과 행함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밝힌 것은 하나님 신앙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완성이란 과정의 길이 있는 법이다. 율법은 그 완성의 길에 있었던 그리스도 이전의 과정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라 기독교를 유대주의의 잘못된 전통으로부터 보호하려 했고, 진정한 율법정신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초대교회에 전하려고 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대주의에 대한 바울의 투쟁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 유대주의라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 율법으로 이해한다면 예수의 본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결코 율법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행함이 없는 율법만 부둥켜 안고 거룩하다고 믿는 유대주의, 율법주의와 투쟁했던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 지켜야 할 거룩한 약속이며 계약을 뜻한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법을 어기고 배반하는 행위에 대한 징계와 심판이 따른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은 율법을 무시무시한 심판과 징계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거부감을 보이거나 구약성경의 무용론을 말하는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고, 이러한 태도를 마치 복음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신 구약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 구약이 구원에 이르는 필요과정임을 알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주의를 향한 자신의 투쟁이 율법 무용론이 아님을 말한다;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7:7).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 7:12 ). 바울에 따르면 율법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께 이르는 교사 역할로 설명한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 3:24).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마태복음 22장에 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 질문을 한다. 율법의 핵심을 무엇이라 말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6:5),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19:18).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 22: 37-40). 이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 마가복음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 12:32 -33). 바울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렇게 전한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5:14).

   

마태복음 5:17 이후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 율법의 완성이며, 율법의 완성인 복음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적인 지를 이해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 드러나는 거룩한 행위 이전의 내면적 동기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살피도록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갖는 철저함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의 완성임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철저히 무릎 꿇게 하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완벽한 율법임을 알게 한다.

   

교회는 율법의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율법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 완성에 이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2013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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