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죄의 치명성과 심각성
교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 죄의 치명성과 심각성 - 대속(代贖)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간의 죄악을 대신한 형벌이라고 증언한다. 교회가 지난 이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간이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한 희생으로 고백해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대속(代贖)이라는 말로 표현해왔다.
대속이라는 말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는 속죄라는 말이 있다. 이는 구약신앙에서 죄를 씻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 죄 값을 치르는 방식이다. 대속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신 씻어주는 속죄의 제물, 속죄 양으로 이해한 것이다.
‘어린양의 피’라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베드로서는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 (벧전 1:19 ) 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할 때, 구약시대의 제사에서 행하였던 죄 씻음의 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와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대신하는 제물들은 모두 죄의 심각성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준다.
바울은 로마서 4:25에서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라고 증언한다. 이는 우리가 지은 죄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나 예수께서 대신 그 형벌을 받아 죽었다는 고백이다. 즉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졌다는 믿음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죽을 처지에서 벗어나 살게 되었다는 뜻으로 ‘대속’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실 때도 자신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셨다. 마가복음 10:45은 그리스도의 육성을 이렇게 증언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 )로 주려 함이니라.” 죄로 죽을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 죽을 사람들의 값을 지불한다는 설명은 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심각하다는 점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의 빚을 진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죄에 대하여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대신 형벌에 처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대속은 죄의 값을 없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을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당신의 아들에게 형벌을 줌으로써 도리어 죄를 더욱 심각하게 여기며 죄에 대하여 엄격하게 심판하시겠다는 의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죄에 대한 심각성 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를 경우,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전에, 죄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이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외아들까지 죽음에 내어놓아야 할만큼 심각한 것임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심각한 태도를 지켜야 한다. 인간의 죄악 된 상황에 대해서 가장 먼저 관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회개를 통한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속량(贖良)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속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이 단어 역시 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구약성경의 신앙에 바탕하고 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4:18);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속량하여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시고 자유하게 하신 사건을 속량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이는 구원의 다른 말이다. 출애굽 신앙은 이스라엘 신앙의 뿌리경험이다. 구약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그들의 거룩한 기억은 ‘출애굽’이다. 이 출애굽 사건이 속량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그 속량이라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연결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첫 편지에서 (고전 6:20)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라고 말한다. 노예 신분에 있는 사람을 돈을 지불하여 샀다는 말은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즉 해방과 자유를 얻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다. 더 이상 옛 주인 아래 신음하고 압박 받으며 종노릇 할 필요가 없는 신분이 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라고 함으로써 죄의 노예로부터, 죄의 공포로부터, 그리고 죄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는 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속량이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할 때, 반드시 자유와 해방을 말해야 한다. 속량이라는 말은 어떤 저주와 형벌과 억압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풀려나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는 뜻이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무엇으로부터 해방을 받았는지, 어떤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를 교회는 분별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노예같은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알기 전에 속량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속량을 말할 때 인간실존의 비극이 무엇인지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2013년 9월 15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