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신앙과 각성

내일아침 2014. 5. 23. 09:03

신앙과 각성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다. 구약성서의 가르침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각성된 눈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에서 처음이고 나중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도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이 둘을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어째서 둘 이 하나냐고 묻는다면 복음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그 이유를 다룰 시간이 없다. 아무튼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갖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 이 또한 복음서를 독서하며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 깨어 있으라’(keep watch) 하는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특히 신앙의 종말적 태도를 가르치는 데서 자주 사용된 단어다. 마태복음 24:42의 증언을 보자;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단어를 단순히 잠에서 깨어나는 상태가 아니라, 정신차리고 집중하여 주의하며 분별하는 이성적 상태를 뜻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를 영적각성’(靈的覺醒/ spiritual awakening)이라 설명해도 틀림이 없다.

 

깨어있는 상태를 지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일을 권하였다. 누가복음 21:36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한다;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영적으로 각성하는 방법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기도는 영적 각성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다. 기도에 대하여 많은 설명이 있겠지만, 영적각성이라는만큼 중요한 목적도 없다.

 

기도란 신앙의 대상을 향하여 직접 말을 거는 것이다.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이 것이 곧 주님 앞에 깨어있는 상태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어 분별력을 갖게 될 때 이를 기도의 응답이라고 한다. 흐릿하거나 깜깜하던 상태에서 또렷하게 이해되고 선명하게 알아차리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 것이 깨어냐 알아차림인 각성이다.    

 

깨어있으라는 단어를 말하는 성경의 다른 증언들을 들어보면 더 풍성하게 이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고전 16:13).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살전 5:6). 베드로 첫 서신도 증언을 보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밷전 5:8).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증언은 이렇다;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3:3) “보아라, 내가 도둑처럼 올 것이다. 깨어 있어서, 자기 옷을 갖추어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며, 자기의 부끄러운 데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16:15). 모두 각성하라, 깨어 있어라, 알아차려라 하는 뜻이다.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각성되었으며 분별력 있고 지혜 있는 똑똑하고 용감하며 신실한 인격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여기 어디에도 나약하고 비겁하여 동굴이나 어둠의 그림자 속으로 자기를 숨기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머리를 흔들며 자기 책임을 외면하고 자기 죄를 숨기며 회개를 거부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기독교신앙을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숨기고 피하도록 이끌거나 그러한 사람들의 집합체로 비판하는 이들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책임적이고 어둠보다 밝은 빛 가운데로 나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고 용감하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지키도록 불러내고 있다. 이 것이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문제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 문제를 직면(直面/face to)하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에 입문하면 가장 먼저 인간 실존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죄와 직면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 죄를 용서받는 길을 가르치는데, 이 용서는 단순한 면죄부가 아니라 죄를 심각하게 직면하는 용기에 대한 보상이며 은총이다. 기독교는 결코 죄를 피하도록 가르치는 법이 없으며,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죄를 직면하고 고백하며 회개하도록 가르친다. 기독교는 불의를 외면하고 거짓을 망각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불의에 맞서 공의(Justice)를 행하며 거짓에 현혹되지 않고 진리를 행하도록 가르친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기도를 통해 자기 죄를 직면하는 것이고, 도망하고 외면하며 자기 문제를 피하려 하는 연약하고 비겁한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영적 노력이다. 기도는 자기 문제를 덮거나 외면하고 맹목적 환상을 갖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도구가 아니라, 반대로 자기 자신의 문제를 피하여 맹목적 환상으로 도피하려는 죄의 본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 기도하라한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알아차리고 똑똑히 이해하고 마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깨달아 마주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와 하나님을 똑똑하게 이해하고 마주보며 알아차리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그 뜻을 올바로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해되면 영적 각성이 일어난다.

 

깨어난다함은 빛과 어둠을, 진리와 거짓을 알아차린다는 분별력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은 어둠의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고, 거짓의 세상에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둔 세상 속으로 생명의 빛이 들어왔다고 비유로 증언하는 것도 그래서다. 빛은 어둠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눈뜨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의 핵심 중 하나로 눈먼 사람들에게 눈을 열게 하는 것임을 밝혔다( 4:18). 이 모두 기독교 신앙이 각성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눈 뜸, 각성은 어둠 속에서 보지 못했던 자기의 죄와 문제를 발견할 뿐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게 한다. 세상의 허물과 문제를 볼 뿐 아니라 온전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 이는 열망과 환상이 아니라 허물과 문제를 극복하는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실이다. 즉 영적 각성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믿음으로 경험하는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유리알처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죄 앞에서 가슴을 치며 어찌할꼬를 외치게 만드는 것이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직면하고 가슴을 치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적 삶의 길로 부른다. 죄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의 삶으로 거듭나는 길을 가는 구원의 길이다. 이 길을 발견하고 진리를 깨우치고 그 길을 가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2014년 5월 22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