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속화 신앙이 교회의 독이다

내일아침 2013. 10. 7. 05:37

세속화 신앙이 교회의 독이다

 

초대교회의 박해를 말하면 교회 밖에서 가해오는 물리적 폭력을 뜻한다. 교회 밖으로부터 물리적 박해를 받을수록 기독교는 더욱 강하고 순결하게 확장되었다. 지난 2천년 역사 속에서 교회 밖의 어떤 물리적 박해도 기독교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 사실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1300여 년 동안 기독교는 외부로부터 어떤 박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세속의 권력까지 지배하는 권세를 누렸다. 그 결과는 교회 신앙의 세속화와 극한 타락으로 나타났다.

 

마르틴 루터가 신앙의 권위는 오직 성서로부터 온다는 신념에 따라 기독교를 개혁해야 할 95개 조항을 선언하면서 그 타락의 저항으로 개신교(Protestant)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를 종교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500 여 년이 흘렀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정신의 바탕에서 출발한 신앙운동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개신교는 세속화의 유혹을 극복하고 있는 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가? 오늘 개신교회는 개혁을 통해 순수한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가? 

 

현대 기독교의 위기는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증명되듯이 외부의 물리적 박해가 교회를 타락시킨 적이 없다. 오히려 박해가 심할수록 교회는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지켰갔다. 교회는 로마 가톨릭처럼 세속적 권력을 등에 업거나, 혹은 세속적 권세를 취하여 행사하게 될 때 타락의 길을 걸었다. 기독교 신앙은 내용에 있어서 결코 세속적 권력이나 기득권과 한 편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이나 세상적 권세와는 언제나 긴장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세상적 가치들은 언제나 극복의 대상이 되었지 환영할 일이 아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 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와 신앙의 세속화(세속적 가치 추구)는 결국  성경 입장에서 타락과 멸망의 길로 가는 길이 된다.    

 

 

 

흔히 골프 운동을 무너지는 운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연습하지 않은 만큼 무너지고 쉬는 만큼 자세가 망가진다고 한다. 어디 운동만 그런가? 꽃밭이 망가지고, 밭이 황무지가 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냥 버려두면 된다. 모든 자연 존재들은 망가지고 부서지는 존재적 특성이 있다. 가꾸고 보수하지 않으면 다 못쓰게 변하고 만다. 그 단단한 쇠붙이도 녹이 슬어 부서진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훈련되고 다듬어지지 않으면 쓸모 없게 된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깨어서 지켜보며 잘못을 찾아내어 고치고 개혁하지 않으면 저절로 타락의 길을 가게 된다.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하지 않으면 엉뚱한 죄의 길로 가버린다. 왜냐하면 인간 실존이 본성적으로 그렇다. 창세기 3장에서 보여준 대로 인간의 타락한 존재다. 비뚤어진 존재라서 잘해도 문제가 나타난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계속 반성하고 개혁하는 일을 멈추면 안된다.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세속화의 길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의 원죄 중 가장 원초적이고 심각한 것은 자기애적 욕망이다. 사실 자기에 대한 집착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절제되지 않으면 파멸에 이른다. 자기애적 욕망을 따라 가다 보면 신앙의 세계가 아닌 세속적 욕망의 바다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하는 이야기 주제들을 살펴보라 돈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집이 얼마며, 자동차가 얼마고, 옷이 얼마요 하는 것으로부터 생활의 모든 부분이 돈으로 계산된다. 날마다 돈으로 살며 돈을 이야기 할 때 영적 가치와 영적 생명은 고갈되고 만다. 모든 일을 물질의 양으로 가치를 계산할 때 이미 영적 가치는 자리를 잃고 만다. 세속화가 완성된 것이다.

 

최후의 심판을 믿는가?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 교리로만 말고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의 의로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음을 마치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하는 것으로 믿는다면 중대한 오해다.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롭게 인정받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최후 심판에 무감각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는가? 보상의 개념은 흔히 말하는 축복의 개념과 다르다. 바울의 말처럼 달려 갈 길을 다 가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최후 승리를 뜻한다. 이는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 의의 길을 지키면서 세상에서 받은 고난에 대한 보상이다. 하나님의 보상함을 믿고 기꺼이 세상의 보상을 포기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이다. 세속화의 길을 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보상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죄의식이 있는가? 마치 복음이 죄의식을 없애는 심리적 안정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심각한 오해다. 복음의 내용은 죄의 각성과 극복에 관한 방법이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죄의 각성과 극복이지 죄의식 실종이 아니다. 용서 받았다는 말 한 마디로 죄의 심각성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용서에 대한 오해다. 용서라는 말을 강조할수록 죄의식 또한 강조되는 것이다. 죄가 없는데 용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용서 받은 사실과 죄의식에 대한 무감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용서 받은 사람일수록 죄에 대하여 더욱 심각하게 여긴다. 죄의식에 무감각할 때 세속의 길로 아무 불편함 없이 빠져든다.

 

책임의식이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곧 책임적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는 말은 곧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책임의식이 실종될 때 너무나 쉽게 세상의 길로 들어선다.  

 

세속화야말로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악마가 진행시키는 가장 교묘한 전략이며 물질적 존재의 인간을 타락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교회의 적은 교회 안에 있다. 신앙의 위기는 사람 자신 안에 있다. 하늘의 가치를 인간 죄의 욕망으로 대체하는 세속적 신앙, 자본주의에 흠뻑 젹셔진 복음이라는 가명이야말로 교회의 독이며 악마의 전위대다.  

  

2013년 10월 6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