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잡는 것이 아니라 잡히는 것이다
믿음은 잡는 것이 아니라 잡히는 것이다
믿음의 주체는 사람이니 믿음을 갖는다는 말을 사람이 스스로 믿음의 대상을 붙잡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기도 한다. 의지가 모자라고 힘껏 잡았어도 힘이 떨어지면 놓치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의 삶을 시작했다 붙잡았던 손을 놓고 믿음 없는 세계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어쩌면 인간이 나약한 존재로 보는 성경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믿음이 신앙의 대상을 굳건하게 붙잡는 행위인 것처럼 보여지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대상인 주님이 나를 굳세게 붙잡는 것이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주님께 꼼짝없이 붙잡히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믿음의 시작 단계를 보자, 대부분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첫 단계는 흔히 교회의 전도라는 가까운 사람의 권유가 있었다. 이 권유에 선뜻 따라오는 사람은 극히 적다. 많은 경우 거절하고, 전도하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한다.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그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스스로 필요해서 교회로 제발로 오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이렇듯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일이 사람 스스로 필요에 따라 시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신앙을 시작하는 일은 일반적인 사례에 속할 수 없는 것이다. 내 경우를 보면 여러 해 동안 친구가 동네 교회로 초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길을 걷다 동네 교회의 예배 실황이 옥외 스피커로 흘러나왔고 무심한 내 귀로 들려왔다. 그 때 설교의 핵심은 최백호의 노래를 인용한 ‘내 마음 어디에’였다. 순간 나는 발을 멈추고 그 설교를 길가에 서서 다 들었다.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나도 잘 불렀던 노랬였기 때문에 그 설교가 내 마음을 붙들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성경에 붙들리고, 성경을 읽다 예수께 붙들려 지금까지 그 분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그 날 이후 나는 그 분에게 붙들려 살아왔다.
나만 그런가? 믿음의 시조라 할 아브라함을 보자. 그는 일흔 다섯 되던 해 고향 땅 하란에서 홀연히 신비한 음성을 듣는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 12:1-2). 수 많은 시간을 밤낮으로 고민하였을 것이다. 잊으려 해도 그 음성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잊으려 할 수록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그 음성이 생생하게 들렸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태어나고 자라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명 같았던 땅과 부모 형제를 떠나 전혀 보증되지 않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갔다. 일흔 다섯이라는 나이에 그리 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그 음성과 그 약속 때문이다. 그 음성을 떨쳐낼 수 없었고, 잊을 수도 없으며, 도망갈 수도 없어서 아브라함은 안정된 고향 땅을 떠나 오직 한 분만을 따라 인생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 사건 그 어디에도 아브라함의 의지가 개입된 흔적이 없다. 아브라함은 오직 그 분에게 붙잡혔었고, 다만 순종하여 따랐던 것일 뿐이다. 이 것이 아브라함 믿음의 전부다.
모세는 또 어떤가? 그는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집트 왕자로 입양되어 40세까지 살았다.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모세를 입양한 이집트 공주도 히브리 아기인 걸 알았고(출 2:6). 모세의 생모가 유모를 했으니 왜 몰랐겠는가. 모세가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동족이 매맞는 걸 보고 욱하는 심정에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다. 그 곳에서 화려한 왕자의 옷을 벗고 광야의 목동으로 사십년 동안 살았다. 나이 팔십이 되어 시나이산 기슭에서 신비한 불꽃을 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집트로 가서 히브리 백성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모세는 다섯차례나 여러 이유를 대며 거부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요구에 복종한다. 결국 평생 오직 하나님 한 분의 뜻을 따라 출애굽 신앙의 영웅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던 분이었다. 세례자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막 1:11). 그리고 곧바로 사막으로 나가 악마의 유혹으로 시험을 받게 되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령이 그를 이끌었다 (막 1:12). 그 이후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을 하게 되는데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 1:14). 요한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랐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성품으로 고백한다.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힘을 넘어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한 사람만 더 보자, 바울이다. 그는 철저한 유대교 신자였고 율법주의자였으며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를 배격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기독교인 체포를 위해 길을 가다 길가에서 갑자기 큰 빛을 보고 눈이 멀며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그 이후 바울은 율법주의와 싸우는 복음의 전사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설명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설계한 적도 없으며 꿈이라도 꾼 적도 없었지만, 평생을 목숨 바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지키며 믿음의 사도가 되어 살았다. 전적으로 예수님께 사로잡힌 때문이다.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배우려고 했던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완전히 사로잡힌 바를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다.
사진/ 엘파소연합감리교회, El Paso, Texas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람이 응답하는 행위를 말한다.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응답했던 사람들, 응답을 넘어 순종하였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능력에 압도되어 사로잡혔던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나서지 않았으며,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그 분의 나타나심에 거룩한 두려움으로 복종했을 뿐이다. 예수님도 사람을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사람들이 사도들이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믿음에 사람의 의지적 행동이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믿음의 행위는 사람의 의지라기 보다는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사로잡힌 사람이 피할 수 없이 복종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의지 이전에 사로잡혀 인간의 의지조차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힘에 압도되는 경험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지적 행위도 결국 주님께 사로잡힌 데서 나오는 것이다.
흔히 신앙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만난다거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또는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핵심을 짚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체험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바울의 고백처럼 붙들려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요리 조리 빠지며,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고, 이런 저런 이유로 피하면서 믿음을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또는 만난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으며, 불가항력적으로 복종을 해본 적도 없이 사람의 의지적 노력으로 신앙의 행위를 하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종교적 행위나, 의로운 행위, 형식적 모양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해온 것이지 선한 행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그 분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의 요구에 순종하며 그 분과 마주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삭개오처럼.
신앙으로서 믿음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일이다. 마치 사람이 노력하여 되는 일이라고 믿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분이 먼저 찾아오신 것이고, 그 분이 먼저 말을 거셨고, 그 분이 먼저 요구하셨으며, 그 분이 먼저 가자고 하셨으며, 그 분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거룩하신 영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것이 첫 신앙, 순수한 기독교 신앙이다. 이 첫 신앙의 순결함을 오늘 모든 교회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오늘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보다 앞서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꾸짖으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 16:23).
사람의 조급한 열심으로 또는 욕망을 따라 무얼 하기보다는, 그 분을 만나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을 분별하며 그 분의 뜻에 복종하고 따르는 일이 믿음인 것을, 때로는 힘들다는 생각에 도망치고 싶어도 그 분의 억센 팔힘에 어찌할 수 없이 골고다 십자가까지 따라가야 하는 종 아닌 종이 되는 것임을, 때로는 배신자의 비겁한 생각에 빠졌다가도그의 음성 그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서 따라가는 길이 믿음인 것을, 믿음이란 불의한 세상에서 진리를 따르는 절대 고독과 쓴 맛이 환희와 달콤한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까닭에 나는 오늘도 믿음의 길을 걷는다.
2014년 2월 22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