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시험받아야 한다
믿음은 시험받아야 한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 대학을 막연히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었을 때 나는 대학을 시험이 없는 세상으로 상상했다. 학문을 하는 전당이라 하니 책 읽고 생각하며 글을 써 내는 공부를 할 것이라고 나 혼자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학에서도 교수에 따라 매주 시험이 있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다 있었다. 여전히 시험의 연속이었던 것에 실망했었다.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레포트를 내고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수업방식인데도 여전히 시험은 있었다. 목회를 시작하여 목사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매 년 논문, 시험, 품행심사, 자격심사를 통과하는 일을 여러 해 동안 거쳐야 했다. 이민을 와 몇 해 전 미국 시민원을 얻는 과정에서도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아 시험 없는 세상은 없는가~~!! 그러나 지금은 시험 없는 세상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까지 시험의 연속이라고 받아들인다.
시험의 치르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시험의 목적은 대체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측정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자리나 그 신분에 합당한 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면 그 과정을 공부해 낼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만한 실력과 능력을 측정하여 알아보는 것이다. 시험 아닌 다른 방법은 없다. 얼굴만 보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지겨워도 시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도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인생, 더 행복한 삶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세상에는 넘쳐난다.
세상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열망하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믿음’이라고 규정해두고 있다. 과거 중세 기독교가 믿음은 물론 ‘돈’ 혹은 ‘권력’과 ‘힘’도 가능하다고 하여 신청자를 마구 받아들이고, 마치 교회가 ‘OK’ 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직행하는 버스에 자동승차가 가능한 것처럼 선전하여 권력과 돈을 끌어모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일이 모두 죄악된 일이었다는 걸 교회는 물론 세상도 다 알고 있다. 믿음이 잘못되어 나타난 죄악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믿음도 무조건 ‘믿는다’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패스권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믿음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인지, 아니면 아무 쓸모 없는 믿음이 될 뿐 아니라 악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가짜 믿음인지를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쪽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믿음이 진짜라고 여태껏 확신해 왔는데, 하나님의 나라 입구에서 자격 없다고 되돌아가라며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 될 것인가? 이 건 상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찌감치 알려주신 팁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두 군데만 읽어보자. 먼저 마태복음 7장을 펴면 예수님의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 전체 설교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7:21-23). 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히며 낮뜨거운 일인가? 여태 믿음 좋다고 소문난 사람들, 기도의 능력 혹은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며 자랑했던 이들이 이토록 모욕적인 저주를 예수님에게서 들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랴 하늘문을 통과 할 수 없는 가짜 믿음이라고 판정받았으니 그동안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 쓸모 없게 된 것을. 진작 믿음을 시험해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 말처럼 자기 믿음에 취하여 하나님 나라의 믿음은 몰랐던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믿음의 행위로 믿음을 판단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예수님의 팁이다. 마태복음 25장을 펴면 종말의 심판을 어떻게 하는 지를 비유를 통해 팁을 알려주신다. 그 중 하나가 이웃을 향한 태도가 곧 주님을 향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라는 기준이다. 내용은 이렇다; 마지막 심판 때 염소와 양을 구별하듯이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한 쪽은(양)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고, 다른 한 쪽은(염소) 영원한 형벌 속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의 비유는 아주 구체적이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 한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하신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믿음은 이렇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 검증받는 것이다.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염소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신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은 이렇게 변명할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정말 억울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변명도 소용이 없는 경우다. 미리 미리 시험을 통해 잘못된 믿음과 옳은 믿음을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심판 앞에서는 후회하여도 아무 쓸모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다 보면 믿음은 시험의 연속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심판 하실 때 모두 필기시험을 보고 점수를 많이 받아 합격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방식은 한국의 입시제도와 흡사한데 불행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방식은 미국식 입시와 닮은 점이 있다. 아니 미국식 입시제도가 하나님 나라의 시험 시스템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평소에 공부도 잘 해야하지만, 이웃을 향해 봉사활동도 잘 해야 하고, 매 학년마다 치르는 시험도 잘 통과해야 하며, 추천서도 잘 받아야 한다. 이처럼 구원 받는 ‘믿음’도 평소 삶을 통해 믿음을 행하여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는 무조건 믿기만 하면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믿음은 행함으로 검증받아야 하는 것이다.
세가지 기본 테스트(Basic Test)
예수님도 40일 동안 금식하며 악마의 시험을 받았다. 무슨 시험이었을까?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하늘 가는 바른 길을 열어주시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악마의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시험은 모두 세 가지였다.
첫 시험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육의 양식인 빵 사이에서 균형지키기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첫 시험을 통과하였다. 이는인간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며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는 영적이고 초월적 존재임을 잊지 않는 시험이다.
둘째 시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 사이에서 균형을 지켜야 하는 시험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간다. 이 세상이 어둠이고 죄악이지만 우리가 떠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며 산다. 이 세상의 삶에 빠져 하나님의 나라를 잊고 산다면 탈락이다. 또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혼돈하면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한 마디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쳐 둘째 시험을 통과하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 쎌까? 이 세상의 힘이 더 쎌까? 그런 시험 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긍극적으로 우리의 희망이고 구원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니 비교하고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세 번 째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하는 시험이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떠나 대상을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상을 향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위한 대상으로 삼는다. 자기애가 강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악마로부터 악마 자신을 예배한다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을 받는다. 즉 자기 만족을 채우기 위해 악마를 숭배하라는 시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예배하라는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친다. 이 것으로 모든 시험은 끝났다. 악마숭배, 우상숭배, 자기숭배, 욕망숭배, 세상숭배 등 모두가 자기만족을 향한 예배다. 신앙의 대상을 숭배하는 것같지만 결국 자기 만족을 숭배한다. 이는 인간의 결정적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험, 예배의 시험을 통과해야 참 믿음이 된다.
믿음은 날마다 시험을 받는다. 시험 없이는 참 믿음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훈련은 이 시험을 잘 통과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복음서를 읽으며 공부를 잘 해야 한다. 예수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 받아들여서 삶에서 참과 거짓을 가려 볼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배운 것을 행동을 통해 삶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 그 열매가 믿음을 검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라는 행위를 통해 믿음의 내용을 드러내고 찬양하며 고백하는 거룩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믿음은 점점 높은 수준의 단계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그 때마다 시험이 따름을 너무 힘들어하거나 귀찮아하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을 향한 도전의 기회로 삼는다면 기쁨이 될 것이다.
2014년 3월 16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