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기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네 번째 기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to.n a;rton h`mw/n to.n evpiou,sion do.j h`mi/n sh,meron\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며 할 네 번째 기도는 육체적 삶을 위한 양식이다. 이 주제는 오늘, 모든 이들에게 가장 마음이 쏠리는 주제일 것이다. 이 구절은 물질적 풍요가 곧 하나님의 복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고, 철저하게 자본주의 소유욕이 하나님의 복으로 오해되고 있는 신앙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기도다. 이 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람들의 원시적이고 일반적 욕망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에도 계속하여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인간이 가진 원시적 소유욕에 대한 강한 경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5-26). 또한 무엇을 먹고 마시는 원시적 욕구를 위한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규정한다 (마 6:32).
‘오늘' 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헬라어로 ‘세메론'(sh,meron) 인데 개역에서는 ‘일용' 이라고 번역하였다. 하루치라는 뜻이다. 즉, 우리에게 하루치 필요한 것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욕심 없는 기도인가? 욕심 많은 사람 입장에서는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 하느냐고 불만을 가질 법 하다. 하루치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기도하면서 바랄 일이 뭐란 말인가 하고 볼멘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오히려 복을 주시되 꾹꾹 눌러 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 일텐데 말이다. 그렇지만 기도할 때는 우리의 욕심을 꾹꾹 눌러야 한다. 우리의 기도하는 것은 욕망을 극복하고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도문은 욕심을 조절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고생 할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어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기억나게 한다. 이 대목은 주님의 의도와 분명한 연관이 있다. 그 때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 오라 했고, 욕심을 부려 더 거두어 들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루 이상 보관되었던 만나는 상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출16장). 필요 이상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다. 필요 이상은 욕심이 되기 때문이다.
사진/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in El Paso, Texas
이 기도문은 ‘필요와 욕심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필요를 구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필요 이상의 욕심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크고 작은 분쟁이나 크고 작은 전쟁도 필요 이상의 욕심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인간이 지닌 개인적인 불행들도 결국은 필요 이상의 욕심을 따라가다 겪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동선수도 욕심이 앞서면 실수를 하여 게임을 망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이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이다. 우리는 필요 이상의 욕심을 절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야고보서 1:15은 이렇게 증언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욕심을 극복하도록 ‘이렇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지만 (마태복음 4:4), 하나님 말씀만 먹고 살 수 없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식물을 먹어야 생명을 부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에 욕심을 내어서도 안되지만, 최소한 필요한 물질은 반드시 확보 되어야 한다. 다만 필요 이상의 욕심을 물리쳐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우리에게'(h`mi/n// us) 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수 단어로서 둘 이상의 공동체를 뜻하는 말이다. 개인의 양식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의 양식을 구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원시적 기도 형식인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와 구분되는 점을 발견한다. 우리 집, 우리 가정을 넘어 이웃과 사회, 민족과 인류를 위한 기도로 승화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필요 이상의 욕심을 극복하고,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한다면 이 세상에 굶주림은 없을 것이고, 먹고 살기에 충분한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교회가 쉬지 않고 해야 하는 기독교 기도이다.
이 기도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은 일용할 양식을 누구로부터 얻는가 하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 정도야 우리의 힘과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세속화 되는 가장 근본적 문제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능력이 커갈수록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가고,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능력을 따라 살며 세상의 힘, 즉 돈과 권력의 힘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일용할 양식 정도는 자기 힘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해버린다. 특별한 보너스가 없는 한 감사할 줄을 모르게 된다. 그러면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지기만 한다. 이 것이 세속화의 진행이다. 교회가 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어떤 조건에서도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조건, 모든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채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풀 한 포기 쌀 한 톨, 사과 하나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매 끼니마다 먹고 마실 때 감사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추가하여 이 기도문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필요 이상의 욕심을 극복하는 길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그것으로 감사한다면 날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월 12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