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경건
교회와 경건
교회에서 사람에 대한 평을 할 때 “아무 개 분은 믿음이 참 좋으십니다” 하는 말이 있다. 물론 반대의 평가도 있다. “아무 개, 그 사람은 믿음이 없어요” 하는 말이다. 당연히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도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리고 믿음의 많고 적음에 대한 평가가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 지는 잘 몰라도 우리는 대체적으로 그렇게 사람을 평가한다. 그 대체적 기준을 굳이 말할 수 있다면 공예배에 참석하는 정도, 헌금 기여도, 교회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헌신도, 다른 사람에 대해 겸손한 태도 등과 같은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러한 기준들도 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덕목들이다.
‘믿음이 좋다’ 하는 말을 ‘경건하다’ 하는 말로 대신할 수 없을까? 믿음이 좋다는 말은 많이 들어도 경건하다는 말을 듣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당연히 믿음이 좋다면 경건하다는 뜻일텐데…. 아마 경건을 엄격한 자기 통제를 통해 얻는 행위로 이해하여 어떤 수도사의 덕목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뜻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수도사적 자기금욕주의쯤으로 이해하며 경건을 신앙의 삶과 격리시키고 종교적 이상 쯤으로 생각하고 무관심하게 대해도 되는 것일까?
신앙에서 경건은 열매에 해당한다. 16세기 초 제네바 감독이었던 프란시스는(Francis de Sales) 경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을 우유라 한다면 경건의 그것의 크림이다. 사랑이 식물이라면 경건은 그 꽃이다. 사랑이 보석이라면 경건은 그 광채다. 사랑이 값진 향유라면 경건은 그것의 향기다.” 우리는 이 말에서 경건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경건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신앙의 인격적 열매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인격적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갈5: 22-23).
이 점에서 우리가 경건을 이해할 때 엄격한 자기금욕을 통한 종교적 계율을 지키는 수도사적 분위기를 떠올릴 일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신앙의 열매이며 향기인 것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금욕적 행위들은 고통을 참고 견디며 극복하는 훈련을 통해 경건에 이르는 방편이 될 수 있으나, 경건 자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기도를 밤을 새도록 했다던가, 찬양을 감격스럽게 불렀다던가, 또는 봉사하는 일을 많이 하는 일들은 경건에 이르는 좋은 훈련이 될 수 있고 또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경건은 아니다. 그러한 행위만으로 경건하다고 할 경우 많은 오판을 할 수 있다. 행위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의 뜻이 거기에 있다. 믿음의 경건은 관념도 아니지만 행위의 형식만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서가 전해주는 신앙의 핵심가치가 사랑인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모든 신앙의 열매가 잉태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가 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거나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격을 평가할 때, 믿음이 좋다거나 혹은 경건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 사랑의 열매를 보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사랑이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말보다 더 어렵다. 어떤 행위가 사랑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하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위선인 지를 자기 자신도 분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Painted Dunes, El Paso, Texas
사랑이란 자기만의 만족이 아니듯이 경건 또한 자기 만족의 길이 아니라 자기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자기 만족과 함께 하나님과 이웃과 삼위일체적 만족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를 제안한다.
경건에 이르려면 사랑이 달콤하듯이 먼저 영적 달콤함을 누려야 하는데 이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함께 성서와 교회전통으로부터 얻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오는 감격이다. 성서를 읽고 연구하여 깨달은 진리에 자신을 비추고 기도하며 회개하고, 자신을 날마다 거듭나게 하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경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진리에 사로잡힘이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처럼 되는 달콤함이다. 이 감동의 충만함에 이를 때 어떤 선한 행위도 힘들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즐거움이 된다.
경건은 앞서 모든 삶의 자리에서 열리는 열매와 같다고 했다. 따라서 경건은 엄숙하고 거룩한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거룩하고 엄숙하게 예배할 수 있는 성별 된 예배당은 경건을 훈련하는데 필요하다. 경건은 그 훈련을 통해 열매로 나타나는 인격이다. 따라서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지 그 열매가 맺고 향기는 바람에 날리며 빛은 어두운 곳일수록 반짝인다. 그러므로 경건은 직장에서, 즐겁게 운동하는 수영장이나 테니스장에서, 머리에 집중하고 공부하는 도서관에서, 배꼽잡고 웃는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 때 나타나는 경건은 다른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해를 입히지 않으려 조심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는 겸손한 태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경건을 이해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의 경건이 같지 않으며 사람마다 경건의 단계가 다 다름을 이해하여야 한다. 어린아이는 이제 걸음마를 하고 있을 것이며, 상처 입고 치료받고 있는 환자는 겨우 일어나 자기 마실 물을 마실 정도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달리며 뛰며 많은 운동을 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각 자 경건의 분량을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며 돕고 배우며 함께 가는 것이다. 자기의 짐만 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짐까지 져 줘야 할 때도 있다. 이 것이 교회의 경건이다.
2013년 11월 12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