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경건과 분별

내일아침 2013. 11. 15. 06:24

경건과 분별

 

경건은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관통하는 신앙의 목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경건(敬虔)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사전적 의미는

초월적(超越的)이거나 위대(偉大)한 대상(對象) 앞에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상태(狀態)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가 주는 의미에 적합한 단어임에 분명하다. 이 단어가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분 앞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나타내는 단어 중에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신앙이란 경건을 실현하는 것이 분명하다. ,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예절을 나타내주는 단어다. 우리가 예절이라는 말과 조심한다는 말을 이해한다면 이 경건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 단어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초대교회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제자이며 아들같이 여겼던 디모데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경건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였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4:7-9)

 

바울의 이 같은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에서 경건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선명하게 한다.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경건을 위하여 두 가지 훈련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하나는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이다. 이는 분별력과 관련된 설명이다. 저속하고 헛된 가짜 이야기를 거부할 수 있는 분//력이다. 또다른 하나는 ///이다. 나는 이쯤 되면 눈물어린 감동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2000년 역사의 교회는 성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빈틈없는 지침을 남겨주었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가 이 둘만 이해할 수 있어도 신앙에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진/ Painted Dunes, El Paso, Texas

                

 

거짓된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경건에 이르기 위한 가장 우선하는 조건이 된다. 이 분별력이 없이는 경건을 시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오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앙을 무분별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경건에 실패하고 있는가? 경건을 분별력과 관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16-17세기의 프랑스 사제였으며 기독교 영성에 큰 영향을 끼쳤던 프랜스 드 살레’(Francis de Sales)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된 경건이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러나 거짓되고 공허한 것들은 참으로 많다. 만일 네가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결국 너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미신적인 것을 따라감으로써 쉽게 속아넘어가거나 방황하게 될 것이다.”   

 

프랜스는 바울이 경건의 조건으로 말한 거짓된 것에 대한 분별력을 말하고 있다. 분별력이 없을 경우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만 빌려 미신에 빠지게 될 것임을 프랜스는 경고하고 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죄의 욕망에서 나오는 거짓된 가치를 따라 가게 될 위험을 경고한 프랜스의 염려는 400여 년 전에나 프랜스의 염려는 2천 년 전 바울의 시대나, 그리고 오늘에서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가치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며 살고 있을까? 오늘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경건한 신앙을 지킨다면서 도리어 악의 유혹에 빠져 있을까?

 

프랜스는 자기 자신의 열정이나 공상을 따라 경건을 이해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경건의 모양은 갖추면서 여전히 증오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경고한다. 그리고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지 않는 경건의 노력은 하면서 도리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인정사정 없이 상처를 입히고 피흘리게 하고 있다는 경고도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경건이라는 모양으로 자신의 악함을 감추고 위장하며 경건에 대하여 망상이나 허상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내용은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그토록 싫어하셨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오늘 그런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이렇게 경고했다(6:5).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가 더 있음). 오늘에도 교회가 능력을 잃고 세상의 소금이나 빛이 되지 못하여 도리어 타락하고 분쟁의 현장이 되는 것은 틀림없이 경건의 문제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 

 

경건의 모양도 없고 내용도 없는, 또는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내용이 없는, 진리는 알고 있어도 몸으로는 훈련이 되지 않아 말만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가는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경건에 대한 오해와 진리에 대한 무분별 혹은 무지, 경건의 모양을 이기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죄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을까? 왜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고 호통을 치셨을까?

,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여 캄캄한 세대여!! 

 

2013년 11월 14일

'내일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