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맞서는 십자가 복음
고전 1:18-31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 1:18).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십자가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저마다 자신들의 지혜를 모아 믿음을 키워가다보니 십자가 복음을 떠나 사람들 중심의 믿음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 그 믿음이란 세속적 가치를 따르는 것이고 세상의 유행을 좇는 것이며 인간의 욕심에 따라갔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사람들의 성향과 세속적인 가치를 따라 파당을 낳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문제로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설득한다.
십자가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며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러분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지요? 십자가 복음대로 살면 세상에서 바보가 되는 것 같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따라가면 세상의 유행에 뒤떨어지고 세상의 경쟁에서 처지며 세상의 많은 것을 잃게 될까 두렵지요?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 죽이고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리석은 일 같지요?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들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이겼다고 믿으니까요. 이 세상을 따라가면 지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따르는 일은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세상의 가치관, 세속적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 말씀은 어리석고 바보같으며 아무 쓸모 없는 짓이 된다. 그러나 바울의 분명한 믿음은 이 것이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서 보면 십자가 복음을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은 모두 멸망받을 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은 이 세상의 질서와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리에 있다. 십자가 말씀은 이 세상과 정반대로 가야하는 길이다. 비슷하지도 않고 닮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일은 거센 바람과 맞서는 것이며, 도도한 물결을 거슬러 가는 일과 같다. 물론 파당 짓고 세력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복음이 인기 없는 내용이긴 하다. 그래도 바울은 이 것이 유일한 길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진/ 엘파소 광야
바울은 바보같고 어리석어보이는 십자가 복음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를 쓸 때 담대하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 1:16). 그러니까 바울에게 십자가 복음의 말씀은 사람을 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세상의 길을 떠나 생명의 길, 하늘 길로 가게 하는 능력이다. 세상의 길이 진리로 보이던 것이 멸망의 길로 보이고, 어리석게 보이던 하늘 길을 생명의 길로 이해하는 능력이다. 그리스도 안에 다시 태어나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십자가 복음의 말씀에 담겨 있다. 누구나 이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면 사람의 힘이나 이 세상의 지혜로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이 것이 십자가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늘의 진리를 이해하는데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할 수 없고, 신비적인 방법으로만 이해될 수도 없다. 바울은 헬라 사람들이 지혜를 찾고, 유대 사람들은 기적을 찾고 있다면서 그래서는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 복음의 말씀만을 전한다고 했다. 그 까닭은 세상의 언변이나 지혜, 그리고 종겨적 신비주의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복음의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원리에 익숙한 사람들, 지금껏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왔던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을 만날 때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십자가 복음을 진정으로 만나 이해하여 지금까지 세상에 익숙했던 자신을 부정하고, 죄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 거듭나는 사람이다. 어두운 죄의 세상에 익숙했던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하며 하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둠과 죄의 세상과 맞서 저항하는 생명력 있는 새 피조물이 되는데, 이는 바울의 말처럼 십자가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 종류는 십자가 복음을 만나지만,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교리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을 이루어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신비적인 종교주의적인 사람들이다. 십자가 복음을 간단하게 교리화 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듬어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 안에 있는 세속적인 죄의 습관과 싸우지 않아도 되며, 그리고 지금껏 죄의 세상에서 지켜온 것을 계속 지켜가도 문제가 되지 않는 복음으로 개조하여 믿고 전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바울은 이들을 가장 경멸한다;“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갈 1:9-10).
복음의 말씀은 세상의 거친 들바람과 맞서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2016년 7월 31일
'내일 아침' 심용섭 목사 쓰고 올림